[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권력이 무너뜨린 삶, 속죄는 개인의 몫인가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권력이 무너뜨린 삶, 속죄는 개인의 몫인가
  • 이규식
  • 승인 2017.05.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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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대전예술의전당

권력이 무너뜨린 삶, 속죄는 개인의 몫인가

(..........)
남명한이 숨을 크게 내쉰 뒤 아버지에게 걸어온다.

남명한: (구겨진 셔츠와 깃을 탁탁 쳐서 펴주며) 우리 심기일전해서 큰 거 하나 터뜨려봅시다. 사나이가 세상에 획을 긋는 큰일 좀 해보겠다는데. (다정히) 어? (몰아붙이듯) 어?
아버지: 내 집에 다녀갔던 사람 중 몇 명이 도통 안 보인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남명한: 누굴 말하는지 알아. 그 사람들, 며칠 내로 귀가할 거야.
아버지: (조심스레) 그 사람들도 나처럼……?
남명한: 프락치로 심을 거냐고? (빙글 웃으며) 신경 끄는 게 좋아. 당신들 서로를 알아서 뭐하려고? 각자 주어진 임무나 잘 하면 되지.
아버지: 대체…….
남명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 일러주지. 우리가 이 저택에 엄청 많은 마이크를 설치했잖아. 그걸 다 못 써먹으니 얼마나 아쉬워.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봤어. 당신은 이 집 주인이라 좌익분자들의 반정부 언행을 끌어내기가 구조적으로 어려운 것 같아. 그래서 말 끄집어낼 놈들 조금 풀어놓자는 거지. 힌트를 줄까? 기자 출신 두엇에, 교수도 있어.
아버지: (고개를 떨구며) 누군지 짐작이 갑니다.
남명한: (끄덕이며) 좁은 바닥이니까. (다가가 어깨 끌어안으며) 다른 마음 갖지 마. 잘 해왔잖아. 한 방이면 끝나, 딱 한 방. 차근차근 준비해서 간첩단 하나 매끈하게 엮어보자.
아버지: 멀쩡한 사람들을 옭아매어선 안 돼요.
남명한: 국가를 거역하고 정부를 엎으려는 자들이 어떻게 멀쩡하지?
아버지: 조금씩 화도 내고, 툴툴거리기도 하면서 살지 않소?
(..........)
아버지: 내가 어찌 했어야 했을까.
남명한: 죄를 죄로 덮는다고 생각하나? 피를 피로 닦아낼 수 없어. 피는 물로 닦아내야지. 죄는 공으로 덮어야 해. 자, 말해봐. 국가의 적이 어디 있지?
아버지: (망설이며) 우리 중에?
남명한: (잔혹하게) 틀렸어. 국가의 적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 존재해. 돋보기로 겨우 발견할 작은 가시 같지. 안기부는 국가의 적을 깊이 들여다보는 돋보기야. 염증을 일으키기 전에 작은 가시를 빼내는 존재들이지.

- 이중세, ‘내 아버지의 집’ 2막 2장 부분
 

[굿모닝충청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희곡작품을 글자로, 책으로 읽기란 그리 수월치 않지만 희곡 낭독은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 어린이들에게는 올바른 발성과 감정을 조절,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고 어른들은 자신이 배우가 되어 희곡을 읽어가면서 일상의 스트레스며 막힌 감성의 통로를 뚫는 유효한 방안이 된다. 격식을 갖춘 무대나 의상, 동작 없이도 대본을 읽어가는 낭독극이 관심을 끄는 것도 주목할만한 문화현상이다.

그러나 아무려면 전문배우들이 장기간 연습을 거쳐 무대에 올린 공연을 보는 감동만 하겠는가. 제7회 대전창작희곡공모전 대상작품으로 이중세 작가의 역작 ‘내 아버지의 집’ 공연 (4월 21-22일, 대전예술의 전당)은 전석 매진 기록을 세웠다.

권력의 부당한 횡포로 개인의 삶, 가정의 단란함이 깨어지고 인간성이 상실되는 비극을 담담히 묘사한다. 설정이나 등장인물들의 성격, 스토리 전개 등이 작품 메시지가 지향하는 큰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약점을 잡힌 화가를 프락치로 삼아 반체제 인사들을 잡아들여 정권유지에 이용하는 공작을 비판의 눈길로 응시하며 그 와중에 초토화된 가정의 비극을 그리고 이어지는 깊은 속죄와 치유의 과정을 보여준다. 시시각각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무너뜨리려는 음험한 국가권력에 대한 경각심과 저항의지를 상징적으로 일깨워 준다.

자신이 연루된 어두운 과거를 참회하고 속죄하는 과정이 얼마나 기나긴지 그리고 어려운가를 김마리아 수녀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조명하고 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연루되었다지만 그릇된 권력으로 인하여 저지른 악행의 속죄가 결국 개인의 몫으로 남아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각도의 물음과 성찰도 아울러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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