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호의 영산강 라이딩] ①굽이굽이 강줄기마다 민초들의 숨결이…
[임영호의 영산강 라이딩] ①굽이굽이 강줄기마다 민초들의 숨결이…
  • 임영호 전 코레일 상임감사
  • 승인 2017.06.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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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은 전남 담양군 용면 용연리 용추봉(龍湫峯, 560m)에서 발원해 광주·나주·영암을 거쳐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총 길이 길이 115.5 km. 유역면적 3371 ㎢. 북에서 남으로 호남의 민초들과 함께하며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지난 2월 13일 임기를 마친 임영호 전 코레일 상임감사는 오랜 계획 끝에 봄기운이 한창이던 4월 초 영산강 강줄기를 따라 길을 달렸다. “라이딩 후 소회를 남기지 않을 수 없어 몇 자 적었는데, 대선이 한창이었던 터라 이제야 글을 내어 보인다”고 한다. 세 차례에 걸쳐 그의 글을 소개한다.

나는 살아가면서 시간의 재촉으로 이리저리 흘러가지 않고 내 중심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여행을 통해서 확인한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고, 익숙한 공간과 사고와 결별하는 것이고, 홀로된 자신과의 대화시간이다 

영산강 라이딩은 세 사람이 갔었다. 일로평안(一路平安)이다. 병원에 근무하는 딸은 응급실에 실려 오는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 사고라며 ‘조심조심’을 수없이 당부한다. 가는 길에 사고 없이 편안했으면 한다. 대전에서의 출발은 서대전역 무궁화호 6시 25분 차이다.

날씨는 황사현상으로 흐리다. 
대전천은 벚꽃이 만개했는데 남쪽은 어떨까. 요즘 봄노래의 강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이다. 목련은 거리에 이미 죽은 듯이 너부러져 있다 

냇가의 버들은 남쪽으로 갈수록 푸르러 진다. 수양버들 잎이 싱그럽다 ‘자연은 신의 예술이다’라고 말한 단테(1265~1321)의 말은 백번 옳다. 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 자연을 이렇게 아름답게 설계할 수 있을까.

동양화 한 폭이 떠오른다.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馬上聽鶯)이다  

‘어느 봄 날,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천안 삼거리처럼 세 갈래로 갈라지는 대로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거꾸로 꽂아도 사는 버드나무처럼 ‘어딜 가더라도 건강해라’는 격려가 담겨있다. 버드나무 위의 꾀꼬리를 쳐다보는 선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거에 낙방한 선비가 아닐까. 올해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완행열차는 여행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느려서인지 경계심이 풀어진다. 느리다는 것은 자기가 주도권을 갖지 않고 상대에게 공간을 내주는 것이다. 자연에게 마음을 주니 눈에 자연이 들어온다.  

한참을 가니 김제역이다.  안개가 자욱하다. 누가 이 아침에 자지 않고 뿌연 빛을 토해 놨을까. 이제 반 왔다. 어느새 해는 높은 산등성 바로 위에 높다랗게 걸쳐 앉아 있었다.

광주역에 8시 49분에 도착했다. 2시간 반 걸린 셈이다. 여기는 원도심이다. KTX는 서지 않는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 인간에만 해당 되는 것은 아니다. 땅도 인간처럼 한번 흘러가면 그만이다. 소외감이 여기 저기 묻어난다. 누군가 ‘공감의 장’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한다지만 떠오르는 해결책은 없다.

영산강 발원지를 가보고 싶었다. 
자전거를 싣고, 차로 30분 정도 달려 ‘가마골’ 계곡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그릇을 굽는 가마터가 많았다. 용이 승천하다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웅덩이(龍沼)가 제법이다.

작은 폭포에서 떨어지며 물보라 치는 모양새가 용의 승천을 믿을 수밖에 없다. 기암괴석이 즐비해 풍광이 아름답다. 이곳은 아직 봄의 전령사가 오지 않은 것 같다. 나무들은 겨울 옷 그대로이고 잔설이 틈새에 숨어 있다. 

담양댐으로 갔다. 댐이라고 하기에는 수량도 적고 크지도 않다. 여기서 부터 영산강이 시작된다. 담양에서 시작하여 광주, 나주, 영산포, 무안을 지나서 목포를 거쳐 서해로 흘러간다. 발원지 기점에서 149.6㎞ 이다.

댐 아래 첫 인증 소에는 벚꽃이 만발했다.  여기서 먼저 죽녹원(竹綠苑)까지 간다. 5년 전 총선에서 낙선하고 이곳을 찾았었다. 당시 댐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은 시내를 이루어 서로 사이좋게 소곤소곤 작은 소리를 내며 흘렀다. 참 자연다운 자연이었다. 지난겨울에는 눈도 없었고 가물었다. 개울에는 물기 한 점 보이지 않는다. 자연이 곧 마음이구나. 황량한 느낌이다.

20분을 달리니 넓은 하천에 경비행기 조종 훈련소가 있었다. 근사하게 말하면 ‘항공 레저 스포츠센터’이다. 일행 한사람이 호기심을 발동해서 한 번 타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몇 마디 하기도 전에 금 새 성사 되었는데 15분 타는데 7만 원이다.

경비행기는 40시간 이상 교육을 받으면 시험을 보고 면허를 받을 수 있다. 경비행기 값은 1억 5000만 원 정도. 렌트하는데 시간당 20만 원이다. 조종사와 단 둘이만 탈 수 있다. 하나의 큰새였다. 스쳐가는 작은 바람에도 몸체가 출렁였다.

멀리 추월산이 보인다. 
담양의 대표적인 산이다. 731m의 높지 않은 추월산은 꼭 사람이 반듯하게 누워있는 모습이다. 기암절벽이 바로 눈앞이다. 담양호가 절벽을 부드럽게 감싼다. 

산이 크고 깊을수록 이 땅의 슬픈 사연도 그 키만큼 쌓인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치열한 격전지였다. 당시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부인 이 씨가 이곳에서 순절했고, 동학군이 마지막 항거했던 곳도 바로 여기다. 민중이 나쁜 지도자를 만날 때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이제 겨우 7㎞ 왔다. 담양의 메타세콰이어 거리는 바로 눈앞에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거리다. 삼십년 전 가로수 408주를 심었는데 이처럼 멋있게 변했다. 아직은 새순이 돋아나지 않아 앙상하다. 연두색 잎이 나오면 이곳은 연인들의 차지가 되고, 나무와 인간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든다. 

이 거리 맞은편에는 메타 프로방스 마을이 있다. 카페, 공방, 식당들이 전시장처럼 들어 서있다. 잠시 들려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진하게 마실 수 있다. 중국의 문호 임어당(林語堂)이 차를 혼자 마시면 이속(離俗)이라고 했다. 산속 절간에 사는 것만 속세를 떠나 있는 것은 아니다. 차의 향과 맛이 킬리만자로 산속에서 헤매게 한다.

여행은 혼자가 좋다. 사람은 자칫 자신에게 이방인이 되기 쉽다. 영국 속담에 여행할 때 아내를 동반하는 것은 마치 연회장에 도시락을 지참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마누라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것 같다.

담양시내는 금방이다. 
관방제림(官防堤林)에 자전거길이 나 있다. 담양읍을 감싸 흐르는 담양천의 북쪽 언덕이다. 홍수를 막기 위해 지금부터 300년 전, 조선후기에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 이 나무들은 현재 천연기념물이다. 어르신이 된 것이다.

이 뚝 방 거리에 국수가게들이 즐비하다. 과거 장터에서 장꾼들을 위한 끼니의 장소였으나 현대화되면서 이 곳으로 나왔다. 뚝 방에 펴놓은 식단이 볼 만하다. 누구네 잔치 집 마당 같다. 국수 한 그릇은 4000원이고, 이 것 가지고는 좀 허전 한가 찐 계란 2개를 얹어 6000원을 받는다. 우리는 여기서 요기를 했다.

눈에 띈 무엇이 보였다. 버려진 폐 창고를 이용한 문화예술 공간이다. ‘담 빛 예술창고’. 60~70년대 양곡창고였으나  2014년에 문화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창고는 2동이다. 한 동은 커피숍과 공연 공간이고, 한 동은 전시실이다. 자연과 어울려  멋졌다.

전시실에 홍성담 씨가 그린 시국을 풍자한 예술품이 걸려 있었다. 세월호 참사와 최순실 국정농단에 관련한 것들이다. 예술은 고상한 형태의 지식이다. 자신의 영혼에 귀 기울여 듣고 솔직하게 기록하는 장르다. 

홍성담은 분명히 블랙리스트에 있는 자 일게다. 과거에도 걸개그림 ‘세월 오월’은 관과의 갈등을 빚었다. 그에게 그림은 무기다. 비평하기는 쉬워도 한 작가의 진가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바로 방제림 자전거길 눈앞에 죽녹원이 있다. 담양군에서 성인산 일대에 조성한 대나무 정원이다. 죽녹원에는 죽림 욕을 즐길 수 있는 2㎞ 이상의 산책로가 있다. 관광객들이 이 날도 많이 찾았다. 이 경치 좋은 산천의 주인은 즐기는 자들의 것이다.

정원 안에는 이이남 아트센터가 있다. 그는 담양출신으로 조소와 영상예술을 전공한 제2의 백남준으로 평가 받는다. 지역의 자랑거리로 예술인을 꼽았다면 지역주민의 수준을 알만하다. 아쉬웠지만 시간이 없어 겉만 보고 서둘러 떠났다. 

죽녹원에서 자전거 길로 40분정도 가면 영산강변에 면앙정(俛仰亭)이 있다. 
영산강 지류인 오래천(午來川)으로 올라가서 천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이다. 그 옛날 제방이 없던 시절에는 이곳까지 강물이 들어 왔다.

면앙(俛仰)은 송순(宋純)의 호이다. 퇴계 이황선생과 학문을 논했던 분으로 호남의 유학자인 기대승(奇大升), 고경명(高敬命), 임제(林悌), 정철(鄭澈)을 가르쳤던 분이다

그의 면앙정가는 가사문학의 원류로 꼽는다. 본래 가사는 양반 사대부들이 불렀던 노래였으나 세월이 가면서 독서위주의 문학적 성격으로 변했다. 면앙은 당의 백거이(白居易)처럼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인 담양에 내려와 제월봉(霽月峰) 아래 면앙정을 짓고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겼다. 면앙정가는 바로 그것을 노래한 것이다.

‘무등산 한줄기 산이 동쪽으로 뻗어있어, 멀리 떨쳐와 제월봉이 되었거늘’로 시작하는 이 가사는 같은 담양출신이면서 후학인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정자 주위에는 참나무들과 붉은 진달래꽃이 피어 있고, 7~8미터 떨어진 곳에는 200년 이상 된 참나무가 홀로 정승처럼 서 있었다. 참나무가 이렇게 크고 오래 살다니 신기하다.

영산강은 이제 천에서 강으로 성장했다. 오래천과 중앙천이 합류하니 하나의 세를 형성한다. 주위는 하나의 큰 평야였다. 호남평야가 그냥 말만이 아닌 것 같다. 내 고향 산내에는 논 10마지기만 있어도 부자로 통했는데….

호남은 넓은 논밭으로 둘러싼 지역이다. 대지주인 양반 사대부들은 먹고 살만한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로움이 이곳을 예향의 고장으로 만들고, ‘춘향가’를 비롯한 판소리를 자수성가하게 했다.

면앙정에서 5㎞지점인 이웃에 가사문학의 거봉인 송강 정철의 송강정(松江亭)이 있다. 
이곳도 영산강의 시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송강정은 국도변에 있었다. 지역 지명이 ‘쌍교’인 송강정 앞길과 주변에 버스와 승용차, 사람들로 붐볐다. 유명한 음식점을 찾은 손님들이다. ‘쌍교 갈비 집’이다.

송강 정철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그는 전라도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이발(李潑)을 비롯한 동인인 호남 인재를 멸문지화(滅門之禍)했다. 송강은 어릴 적 아버지 유배지인 전라도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장기 훈수를 두다가 이발에게 수염을 뽑히는 수모를 당했다. 역적의 자식이 시키지 않은 짓을 했다는 이유이다. 그는 1589년 ‘정여립의 난’ 당시에 대사간이었던 이발을 참혹하게 보복했다. 

수사를 책임진 그는 이발을 역모로 몰아갔다. 이발은 고문으로 죽고, 노모는 맞아 죽고, 아들은 압슬형을 받다가 죽었다. 당시 영호남 동인계열 천 명 정도가 학살당했다니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전라도 광산 이 씨는 고기를 다질 때 칼질하면서 “정철, 정철” 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증오정치가 빚은 과오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후 촛불집회와 태극기를 든 시민들이 도심광장에서 대결했다. 약하고 작은 우리가 분열과 대립으로 날을 세우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제발 차기 정부는 화해와 통합의 정치를 하길 바란다. 가장 고귀한 복수는 관용(寬容)이다. 다름이 틀린 것이 아니다.  동(同)의 정치가 아닌 화(和)의 정치를 보고 싶다.

송강정 한 쪽에는 죽록정(竹綠亭)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정철이 고향에 온 초기에 죽록정이라는 초막을 짓고 지냈다. 동인의 탄핵을 받고 이곳에 내려와 4년 동안 조용히 은거하면서 유명한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지었다. 그 후 초막은 사라지고, 1770년경 남아있는 주춧돌에 후손들이 정자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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