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엄숙한 시, 경건한 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엄숙한 시, 경건한 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 이규식
  • 승인 2017.07.08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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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한 시, 경건한 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레몽 크노

낱말을 한 두 개 집어 들고
계란처럼 삶으세요
한 줄기 자그마한 상식과
순진이라는 큰 덩어리를 합해서
약한 불에 데우시오
기교라는 작은 불 위에 말이오
수수께끼 같은 소스를 치고
별 몇 개를 그 위에 뿌리시오
후추를 친 다음 달아나는거요

도대체 뭘 말하자는 겁니까?
글을 쓰려는 겁니다
정말이오? 글을 쓰자는 건가요?

- 레몽 크노, ‘시학을 위하여’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우리말에는 같은 표기라 해도 각기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는 표현이 적지 않은데 언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활용하는 시창작 기법은 특히 서양 여러 나라 시에서 자주 활용되었다. 이런 경향은 20세기 프랑스 시인 레몽 크노(1903-1976) 같은 경우에서 극한을 보여주었다. 당시 예술가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초현실주의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으나 이내 이 운동의 리더였던 앙드레 브르통과 결별하고 독창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시는 특히 시어에 대한 집요한 추구와 실험정신이 돋보인다. 언어 실험가, 문체 탐구가로서 어감을 깊게 파고드는 그의 시창작 태도는 극단으로 치달으며 철두철미했다. 오랜 세월 화석화되고 먼지에 싸인 언어를 궁리하고 새로운 의미와 숨결을 부여하는가 하면 일상시중에서 쓰이는 숨 쉬는 언어를 지향하며 모국어의 지평을 넓히는데 기여한 시인이었다. 새로운 낱말을 만들거나 은어와 조어 그리고 속어 등을 사용하며 같은 단어에 깃든 다양한 의미를 탐구하는가 하면 철자와 문법을 새롭게 제시하는 독자성을 펼쳤다. 프랑스 시에서 레몽 크노만큼 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생산적인 언어의 유희에 탐닉한 경우도 그리 흔치않다. 이런 해학과 유머, 말장난에 그칠법한 문체와 시적 탐구 속에 자신의 독특한 철학과 인생관을 펼쳐놓는다. 삶의 허망함, 존재의 불안정과 우리를 떠나지 않는 죽음의 그림자 그리고 세상과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포착하는 능력이 여기에 뒤따른다. 

‘시학을 위하여’에서는 얼핏 보면 시에 대한 경멸과 야유, 조롱이 읽힌다. 레몽 크노는 평생 시를 썼으면서도, 15권이나 되는 시집을 펴냈지만 이런 스타일의 생각과 글을 멈추지 않았다. 시라는게 뭐 대단한가, 시를 쓰려면 단어를 좋아하는 것으로 족하다, 나아가 오늘 저녁 내가 후대를 위해서 시를 쓴다는 가당찮은 생각을 한다면 그야말로 개똥이다 라는 극언을 하기도 했는데 블랙 유머, 자조적 감성 그리고 부정적 의식 속에서 시에 대한 크노의 집착과 고민이 읽힌다. 말하자면 겉으로 드러나는 해학과 유머, 장난끼와 조롱 속에 세상과 인간의 허무를 꿰뚫어 보는 철학자의 고민이 자리한다. 관념과 서재에 틀어박힌 묵은 언어를 제거하고 살아있는 생생한 말을 시에 담으려 한 것이다. 그의 시 행간에서 읽히는 부조리 의식은 21세기 우리가 당면한 여러 현안과 고민을 수십 년 전에 적시하고 나름 해법을 제시한 선구자로 빛난다.

아직 경건, 엄숙, 신비 그리고 교훈을 시와 연결시키면서 자신도 잘 이해 못하고 설명하기조차 힘든 이해불가, 자기만족의 시가 양산되는 우리 시단에 거의 한 세기 전 크노가 노래한 삶의 무의미, 죽음의 확실성 그리고 존재의 형이상학적 불안, 회의적 인간관계 같은 화두는 현대시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음미할만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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