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단군조선은 동북아·중원의 지배자 요순·하나라 ‘상국(上國)’
[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단군조선은 동북아·중원의 지배자 요순·하나라 ‘상국(上國)’
신화로 가려진 단군조선 - 하·은·주 3대(代) 교섭사①
  • 김탁
  • 승인 2017.07.2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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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중앙은행이 2016년 발행한 단군기념주화

[굿모닝충청 김탁 우리역사바로알기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하夏나라는 지나 한족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세습왕조입니다. 우왕禹王이 하나라를 건국하기 이전 시대는 삼황오제 시대라고 하여 복희씨 신농씨 같은 우리 배달민족의 지배자들이 중원대륙으로 진출하는 시기를 말합니다. 이 삼황오제시대는 세습왕조가 아니었고, 지역별로 할거하는 여러 세력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는 부족집단이 패권을 행사하는 시기이었습니다. 이 때 패권을 주고받는 형식을 미화해서 선양제禪讓制라고 합니다.

오제시대 말기인 요堯, 순舜 대에 황하가 범람하여 대규모 치수사업을 우의 아버지인 곤鯤으로 하여금 관장케 하였습니다, 곤은 천하를 차지할 야심을 품고 성벽을 높이 쌓고 9년 동안 치수사업을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에 요임금의 섭정으로 있던 순임금이 곤을 참하고 곤의 아들인 우 문명文命에게 치수할 것을 명하니, 우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도산국에 장가를 들고 도산회의를 소집하여 동방족의 협력을 구하였습니다.

드디어 치수사업에 성공한 우禹가 세력을 얻어서 순임금을 창오의 들에서 시해하고 이룩한 왕조가 하나라입니다. 이 때부터 왕위선양 제도가 사라지고 우왕의 후손들이 왕권을 차지하는 세습제가 정착되었기 때문에 지나 역사에서 최초로 서방한족이 세운 세습왕조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하왕조가 성립한 명확한 시기는 미상이나 중국의 하상주 단대공정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서기전 2070년경에 건국해서 470년 정도 존속하다가 서기전 1600년경에 은나라에게 멸망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정확한 연대는 아니고 대략 100-200년 정도의 오차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은나라처럼 대규모 유적지가 발견되지 않아서 고고학적으로는 그 존재를 증명할수 없지만 <서전>이나 <사기>와 같은 문헌에 따르면 마지막 17대 걸왕 시기까지 황하중류 하남성을 중심으로 산서성·산동성 일대에 존속한 성읍국가로 보고 있습니다.

단군조선의 건국시기를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따라서 ‘요임금 50년’ 이라는 기록을 기준으로 서기전 2333년으로 추산하고 있는 바, 지나대륙에서 요·순·우왕이 지배하는 시기인 요임금 시대 75년, 순임금 시대 50년, 하나라(우왕~17대 걸왕) 시대 470년은 단군조선 개국 후 550년 정도의 역사를 함께 공유하는 셈입니다.

이 시기에 단군조선과 하나라가 교류한 기록이 고려 말 행촌 이암선생(1296-1364)이 저술한 <단군세기>, 조선시대 이맥 선생이 1520년경에 저술한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조선 숙종 때의 인물인 북애자 선생이 쓴 <규원사화>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전>, <회남자>와 같은 중국문헌에도 교류를 입증할 수 있는 명확한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한중 문헌을 토대로 단군조선의 실존과 중원교류사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배달국)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현 산서성 대동부로 비정)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垈(현 산동성 태산과 회수지역)를 평정하셨다. 산을 뚫고 길을 내시니 땅 넓이는 만리에 이르더라. 단군왕검은 제요도당帝堯陶唐(요임금이 세운 나라이름이 당임)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虞舜(순임금의 나라는 우虞)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달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9년 홍수를 당해 그 피해가 만백성에게 미치니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과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塗山에서 만났다. 순 임금은 사공인 우禹를 파견하여 우리의 오행치수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우禹를 낭야성(산동성 제성현 동남쪽)에 두어서 이로서 구여분정九黎分政(주1)의 뜻을 정하였다. 바로 서경에서 말하는 바의 ‘동순東巡하여 망제望祭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東后를 찾아 뵙다’(주2) 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진국辰國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하는데 낭야에 한 번씩 이르른다. 제후인 순舜은 진한에 조근朝覲(조회에서 천자를 뵈는 것) 하기를 네 번을 했다.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게 세상에 소문난 자를 골라 번한番韓이라 하고 부府를 험독(하북성 노룡현)에 세우게 하였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王儉城 이라고 한다.” <태백일사 번한세가 상>

(※주1) 구여분정九黎分政. 구여/구려는 옛 부터 우리 민족을 부르는 호칭가운데 하나이다. <중국민족사>에서도 ‘치우는 구여의 후예이다(蚩尤爲九黎之後), 묘족의 나라 이름은 구여인데 군주의 이름은 치우이다(苗族國名爲九黎 君主名蚩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여분정 이라는 표현은 단군왕검이 지나대륙에 진출한 구여족(동이족)을 독립적으로 나누어서 다스렸다는 뜻이다.

요임금

(※주2) ‘동순東巡하여 망제望祭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東后를 찾아뵙다’ 원문은 <서경>의 기록이 있다. 서경의 이 기록은 고대 한중관계사에서 단군조선의 우월적인 지위를 나타내 주는 결정적인 기록 이다. 동후東后는 서경 우서虞書 순전舜傳에 있는 것으로 제후인 순임금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동방천제(東后), 즉 단군조선의 천왕을 의미한다. 지나 역사가들은 순임금을 높여서 그 아래에 있는 동방의 제후를 찾아보았다고 해석하는 망발을 하고 있다. <환단고기>에 ‘사근동후肆覲東后’ 라는 말은 제후가 천지를 알현하는 것을 표현 하는 말로서 보아야 한다.
“치두남蚩頭男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 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禹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에 요중遼中에 열두 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 영지, 탕지, 용도, 거용, 한성, 개평, 대방, 백제, 장령, 갈산, 여성이 그것들이다. 치두남이 죽으니 이들 낭사가 즉위하였다. 이해 경인3월 가한성可汗城을 개축함으로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사성 이라하니 번한의 낭사에 세워진 때문이다. 갑술년에 태자 부루는 명을 받들어 도산으로 가는 길에 반달동안 낭사에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했다. 우순도 역사 사악四岳(제후를 통솔하는 우두머리들)을 인솔하고 치수의 여러 일들을 보고했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어키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에서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은 회淮와 대垈 지방의 사이에서 크게 행하여 지게 되었다.” <태백일사 번한세가 상>

순임금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을 통해서 우사공禹司空에게 고하여 가로되, “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三神上帝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 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 이라고 했다.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 이다. 또 여기 천부왕인天符王印, 신침神針이 하나 있나니 능히 물의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 할 것이다. 또 황거종皇鉅宗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고 하였다. 이에 우虞나라 사공은 삼육구배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천제아드님의 명을 게으름 없이 업으로 삼아 저희 우虞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 보답함은 크게 기꺼운 일로서 반드시 그리 하리이다”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 부터 금간옥첩을 받으니 무릇 오행五行은 치수의 요결이다. 태자는 구려九黎를 도산에 모으고 우나라 순舜임금에게 명하여 곧 우공虞貢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이른바 우공禹貢이 그것이다.” <태백일사 번한세가 상>

하나라 우왕

도산회맹에서 태자부루가 하사한 삼보는 천부왕인天符王印, 신침神針, 황거종皇鉅宗 이 세 가지인데 천부왕인은 신표이고 신침과 황거종은 토목공사에 관련된 기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금간옥첩은 지나측 기록인 <오월춘추>에 있는 말이기도 한데 동쪽의 창수사자가 하나라 임금인 우에게 하사한 치수의 비결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창수사자는 곧 북극 수정, 천제의 아들인 태자 부루를 말하는 것이고  금간옥첩은 <오월춘추>에 나오는 말로서 황제가 자부선인에게 전수 받았다고 하는 삼황내문과 더불어 배달 동방국의 문명이 서방으로 흘러갔음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위 글에 ‘우공虞貢’이라고 함은 서경書經의 하서夏書 우공虞貢에 나오는 말로써 하나라 우禹임금이 종주국인 단군조선에 조공하는 품목이나 예절 등 상국에 대한 공경을 기록한 것인데 거꾸로 우임금이 그의 백성들로 부터 거두어들인 공물의 양이나 종류를 적은 것으로 둔갑시켜 놓았습니다. 지나 중국인들은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이렇듯 중화에 집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갑신년에 하나라왕 소강(제6대 임금)이 사신을 보내 새해인사를 올렸다.” < 태백일사 번한세가 상>

번한은 삼한관경제를 시행한 단군조선의 진한 마한 번한의 하나입니다. 중원대륙과 가장 가까운 하북성 지역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하나라와 가장 빈번한 교류를 한 관계로 번한세가에 그 교섭관계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번한의 수도인 왕검성은 난하하구인 하북성 노룡현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황하중류 하남성에 위치한 하나라와 하북성에서 발해만을 면하고 있는 번한은 황하를 이용한 수로를 이용하여 교류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단군조선(진한)은 번한을 통하여 중원의 패자인 요임금, 순임금과 하나라 우왕을 지배하였고 특히 황하강 치수사업에는 단군조선과 도산국의 협력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우왕은 하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으니 단군조선은 중원대륙과 동북아를 아우르는 실질적인 지배국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회에도 계속해서 단군세기와 중국문헌에 나타난 하나라와의 교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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