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서랍만 달린 겨울을 만나러’ 나서는 젊은이들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서랍만 달린 겨울을 만나러’ 나서는 젊은이들
  • 이규식
  • 승인 2017.07.2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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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서랍만 달린 겨울을 만나러’ 나서는 젊은이들

남들은 4년이면 마치는 것을
나는 5학년까지 하게 되었다.
그것도 지방 사립 대학을
증서 없는 졸업식 날 학교 떠나는
친구들이 모아 주는 30만원으로
나머지 1학점의 등록을 마치니
노천 강당의 개나리 넝쿨은
올들어 두 번째 피어났다.
낯선 이름과 언어가 붐비는
수요일의 한 시간을 위해
두시간 거리의 직행 버스로 등교하면
지독하게 피곤하였다. 그 다음 날도
이렇게 한 주간이 쉬 지났다.
대학원에 다니냐는 후배들은
모란이 피자 모두 아스팔트 위로
파도처럼 밀려나고, 나만이
텅 빈 풀밭에 오그리고 앉아
흩어진 과우들에게 엽서를 쓰거나
도시의 변두리가 돼버린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동네 어른들이 입을 모아 흉년이 들었다고 하는 동안
코스모스 피는 가을은 슬쩍 찾아들고
5학년 1학기도 한 달을 더 끌다
끝났다. 자, 가야지 내일은
경제학사 학위를 받으러
성이 최씨로 바뀐 무거운 앨범도 찾고
홀로 교문을 나서는 나를 만나러
서랍만 달린 겨울을 만나러.

- 채충석, ‘겨울의 첫걸음’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198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니 대략 1970년대 말∼1980년 대학풍경과 느낌을 담았을 것이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그 당시 신춘문예 당선작의 대체적인 분위기며 문체, 서사구조를 벗어나 흡사 독백체 수필을 읽는듯한 색다른 인상을 주는 이 작품의 심사위원들은 소박하면서도 호소력있는 자기표출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유신정권 말기에서 신군부 통치가 시작되는 그 즈음, 어수선한 대학상황속에서 1학점 남은 학점취득을 위하여 등록을 하고 일주일에 한번 등교하는 시인의 성실하고 정공법적인 대학생활이 선명하게 읽힌다. 아니,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원칙과 성실, 우직할 정도로 규정을 지키며 불안한 청년시절 나름 꿈을 키워갔다. 지금 같으면 인터넷 강의도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모자라는 학점을 채울 수도 있으련만, 겸연쩍은 5학년 1학기 생활도 끝나고 무거운 앨범도 찾으며 졸업준비에 나선다. 지금 대학가에서는 앨범을 구입하는 졸업생을 찾기 쉽지 않다. 예전 어마어마한 가격에서 대폭 인하되었고 영상파일에 담긴 앨범도 나오지만 거의 외면하고 있다. 휴학이 빈번하니 함께 졸업하는 쓰는 동기생들이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소속감이나 유대의식이 튼실치 않아 앨범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 시인이 지인들게 보내던 엽서는 이제 박물관에서나 볼만한 유물로 바뀌어 가고있다.

대학공부를 마치는 시인의 의식에 ‘사회’, ‘진로’, ‘취업’이라는 개념이 작용하여 시행에 언뜻언뜻 비칠만도 하련만 찾기 힘들다. 친구들보다 늦게 졸업하는 외로움을 “홀로 교문을 나서는 나를 만나러/ 서랍만 달린 겨울을 만나러.”라는 구절로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따름이다.

그로부터 근 40년, 우리 대학은 참으로 많이 변화하였다. 채충석 시인에게등록금 30만원을 모아주던 친구들의 끈끈한 우정도, 아스팔트로 나서던 대학생들도 보기 힘들다. 당시 도시 변두리가 되었던 고향은 이제 도시 그 자체가 되었을 것이다. 농촌의 피폐를 한탄하는 어르신들의 걱정도 여전하다. 시인은 서랍만 달린 겨울을 만나러 세상으로 나선다 했지만 지금은 서랍은 커녕 온통 찬바람 부는 겨울 한복판으로 경제학사, 문학사, 공학사, 이학사들은 걸음을 옮기고 있다.

등단 이후 8년만인 1989년 채충석 시인이 시-판화전을 열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 채충석 시인의 작품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  40년전 대학, 대학생들의 애환과 꿈을 투영한 이 작품이 이즈음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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