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지구 끝에서 들려오는 순수한 언어의 노래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지구 끝에서 들려오는 순수한 언어의 노래
  • 이규식
  • 승인 2017.08.0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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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원대 캠퍼스 홍희표 시비 (사진=목원대 홍보팀), 커리커쳐= 조병화 시인

지구 끝에서 들려오는 순수한 언어의 노래

라일락 꽃잎을 헤치듯 얼음판 위를 달리듯 네가 아빠하고 부르면 나리, 너의 그 고운 목청의 떨림에 개울물에 잠긴 흰 조약돌처럼 찡하니 마음이 시렵단다. 이 지구 끝에서 조금씩 나오는 순수한 언어, 나무들이 숨소리 같은 그 언어들을 나리, 네가 일깨워 준다. 숙취 끝에 떨리는 안개, 손톱에 끼이는 때, 한낮을 울리는 백묵에, 긴 하품, 의자에 삐걱이는 바지통, 마른 수양버들, 담뱃재, 하염없이 잠든 뮤즈, 그런 틈바귀에서 나는 종종 네 목청을 생각하면 그때마다 꽃술 위에 피어나는 햇빛으로 나의 일상은 별이 돌고 뜨거운 것으로 내안內岸에 가득 찬다

- 홍희표, ‘지구 끝에서’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 스무살 청년, 시인이 되다
이즈음 노년층의 문단진출 추세는 놀랄만하다. 퇴직하고 나서 인생2모작 차원에서 시인으로, 수필가와 아동문학가로 등단하는 중년, 노년은 엄청난 규모. 젊은 시절 문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이런저런 여건의 제약으로 여의치 못했는데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면서 문인이 되려는 꿈을 현실화하는 분들의 열정과 의욕은 자못 뜨겁다. 문인의 저변확대라는 차원에서, 문학의 보급이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나이로 일괄적인 규정은 위험하지만 유연하고 감성 수용에 더없이 예민해야 할 문예창작에 있어 물리적인 연령이나 경직된 시선, 고정관념 등이 일정부분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남는다. 지금도 젊은, 어린 문인들이 꾸준히 등장하지만 중년, 노년층의 약진추세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 20세에 ‘현대문학’ 초회 추천을 받고 이듬해 천료, 등단한 홍희표 시인은 젊은 시절부터 ‘원로’였다. 스무살 이상 연상인 고 박용래 시인과 허물없이 교류하며 지란지교를 나누었고 201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5년간 지역문단을 지킨 현장의 증인, 터줏대감으로서의 역할과 공헌이 돋보인다. 특히 홍희표 시인이 발표한 작품들의 역동적인 상상력과 정치한 언어구사 그리고 시인의 사명과 위상에 대한 드높은 긍지는 문학의 외연확장이 급진전하는 오늘날 소중한 성취인 동시에 지속적인 과제로 남는다.

# 아름다운 父情 아름다운 노래
팍팍하고 메마른 일상에 촉촉한 물기를 돌게하고 밤하늘의 별들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딸의 목소리. 아들의 목소리라 해도 좋다. ‘나리’ 라는 이름의 딸과 ‘나리’ 꽃이 표상하는 자연을 유연하게 이어가면서 딸의 목소리에서 시인은 그때까지 눈여겨, 귀 기울여 보고 듣지 못했던 자연의 미세한 움직임, 율동에 새삼 예민해진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연상, 시인의 생각과 감성이 미치는 대상 전부는 비로소 생기가 돌고 충일감으로 위로를 얻는다. “숙취 끝에 떨리는 안개, 손톱에 끼이는 때, 한낮을 울리는 백묵에, 긴 하품, 의자에 삐걱이는 바지통, 마른 수양버들, 담뱃재, 하염없이 잠든 뮤즈”처럼 딸의 목소리를 일깨워주는 다양한 이미지는 일견 산만하고 무질서해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 정연한 공감각의 체계로 청각과 시각, 후각과 촉각이 한데 어우러지는 코스모스의 세계가 펼쳐진다. 일상에 별이 도는 그런 느낌.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 딸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건네는 노래는 어느 경우에나 아름답다, 예술성의 높고 낮음을 떠나 진솔한 토로에 바탕하기 때문이다.              

놀뫼나무 늙은 애기 용래가 살고 있다
……
능선 따라 가버린 충청도 어둠이 있다
……
만년동 순대집 앞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
……
둑길을 걷다온 한성기 바닥 얇은 흰고무신이 있다
……
저문 산 아래 말집 호롱불 잠자는 백제가 있다     
                               
- 유재영, ‘홍희표 시인의 시에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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