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이런 사랑을 지켜보는 치자, 치자꽃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이런 사랑을 지켜보는 치자, 치자꽃
  • 이규식
  • 승인 2017.08.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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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꽃, 출처=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국립수목원)

이런 사랑을 지켜보는 치자, 치자꽃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 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가랑비 엷게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 박규리, ‘치자꽃 설화’ 전부

#. 왜 치자꽃 일까
한편의 뮤직 비디오를 보는 듯 선명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정경이다. 스님과 여인 그리고 화자, 이 세명으로 구성된 감성 드라마를 우리는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장황한 설명 없이도 상황과 심리상태를 이해할 수 있고 무어라 말 건네기도 어렵게 독자는 그저 세 인물이 각자 자기 길에 정진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런 분위기를 넌지시 바라보는 돌계단 밑 치자꽃은 증인이자 그 자체로 모든 것을 감싸주고 포용하는 의미있는 생명체로 등장한다.

치자.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지에 자생하는 식물로 꽃은 흰색이고 열매는 노란색으로 그 유익함은 주로 한약재로 쓰이면서 두드러진다. 해열, 소염 진통 작용, 스트레스 해소와 심신 안정, 불안감과 불면증 해소, 간의 열을 내리게 하고 눈의 피로를 덜어주는가 하면 기미까지 제거해준다니 이런 효능이 시에 등장하는 세사람이 겪는 심신의 고단함을 풀어주는 신묘한 영약의 기능을 할지 모른다. 숱한 꽃과 열매 가운데 왜 치자가 등장하는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가슴이 답답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엎치락 뒤치락할 때 치자가 효험있다고 한방은 전해준다. 치자, 치자꽃은 산문(山門)에서 전개되는 정념과 체념, 속세의 미련과 수행의지가 빚는 갈등과 정화를 묵묵히 지켜본다. 그리고 화자마저도 휩쓸려 들어갈뻔했던  그 감정의 여울을 다스리며 포용과 진정의 지혜를 들려주는 듯 하다.
 
#. 감정을 절제하면 공감과 여운이 커진다

전국 여러 시 낭송대회에 단골 작품으로 등장하는 ‘치자꽃 설화’를 심사위원으로, 더러는 청중의 자리에서 자주 듣는다. 이 아름다운 한편의 시는 낭송용으로 매우 적합함에도 막상 대상이나 금상 수상자를 그리 많이 보지 못하였다. 낭송자 스스로가 감정에 겨워 적절한 통제선에 머물지 않고 먼저 흐느껴 하기 때문이 아닐까. 격정적이면서도 절제된 스토리를 짐짓 능란하게 펼치면서 일정부분 감정노출을 거두어 들이고 듣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면 좋을 것이다. 가령 80%를 낭송자의 감정전달로 펼쳐놓고 20% 정도는 청중 스스로 느끼고 수용하도록 여운을 남겨두는 것이 이 작품의 의미를 높이고 치자, 치자꽃의 넓고 깊은 함의를 받아들이는 지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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