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다같이 풀리는 기쁨으로, 흔들릴 때마다 한 잔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다같이 풀리는 기쁨으로, 흔들릴 때마다 한 잔
  • 이규식
  • 승인 2017.09.0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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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다같이 풀리는 기쁨으로, 흔들릴 때마다 한 잔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 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꾼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얽히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다만 다 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 감태준, ‘흔들릴 때마다 한 잔’ 전부

#. ‘취하시오’
1970년대에 쓰여진 작품이지만 4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읽어도 변한 것은 별로 없다. 공감이 용이하다. ‘주모’라는 명칭이 이제 사라졌고 여러 안주 중에서 유독 참새구이를 볼 수 없다는 사소한 변화를 제외하면 포장마차 분위기나 술 마시는 패턴이나 술꾼들의 정경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포장마차안에서 지금도 담배를 피울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프랑스 상징주의를 연 샤를 보들레르가 쓴 ‘취하시오’라는 산문시가 이 대목에서 떠오른다.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짓누르고 허리를 땅으로 굽게하는 무시무시한 시간의 중압을 느끼지 않으려면, 쉬지 않고 취해야 한다. 무엇에 취하냐고? 술과 시 또는 도덕, 당신 취향에 따라. 하여간 취하시오”

도취의 방안으로 제시한 세가지 가운데 시와 도덕은 추상적이고 접근이 수월치 않다. 당시 시인들이, 서민들이 즐겼던 술은 독주 압셍트였다. 초록색 압셍트에 비친 19세기 유럽사회 풍속도를 ‘흔들릴 때마다 한 잔’에 비쳐본다. 보들레르가 이 시를 쓴 19세기 중반은 산업과 문명의 급속힌 발달 속에 속물적이고 배금사상에 젖은 부르주아들이 득세하던 시기였다. 시인과 지성인들의 소외와 비아냥이 ‘취하시오’라는 한 마디로 축약된다. 1850-60년대 프랑스, 1970년대 이른바 근대화에 매진하던 우리 사회 그리고 4차산업혁명이라는 화두 앞에 기대와 불안을 함께 내비치는 지금 우리 모두의 감성이 엇비슷하게 이 작품에 집약되는 듯 싶다.

#. ‘흔들림’에서 ‘풀림’으로

우리 정서에 친근한 3.4, 4.4 그리고 3.5조 리듬이 이 작품에 흥건히 배어나온다. 그 가락을 타고 술잔을 기울이는 술꾼들은 퇴행으로 치닫지 않고 긍정의 정서로 포장마차를 나선다. 늦은 밤 술집, 거나하게 취해버린 꾼들의 언행은 예상을 빗나간다. 일종의 반전이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다만 다 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흔들릴 때마다 마신 한 잔의 술은 마침내 존재를 풀어준다. 눈이 풀리고 혀가 풀리고 마침내 응어리진 마음이 풀리고 너와 나 사이의 경계는 풀린다. 음주가 주는 명정의 폐해를 접어두고 긍정과 소통의 분위기로 마무리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멀리 뒷산의 단풍 쓴 나무들도 술자리에 합석한 듯 함께 흔들리다가 술집을 나설 때는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잎을 털어낸다니 멋진 술꾼의 경지이다. 아, 이런 술꾼들. 희로애락의 흔들림이, 술잔의 리듬을 타고 가까이서 멀리서 번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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