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동안거 자작나무 숲에서 귀 기울인다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동안거 자작나무 숲에서 귀 기울인다
  • 이규식
  • 승인 2017.09.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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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거 자작나무 숲에서 귀 기울인다

자작나무. 사진=조현석

산문을 지나면 계곡 길

지문을 묻히는 바람 같이 산을 오르네

바위를 지나고 잡목 숲과 억새 덤불을 스칠 때

소소한 바람소리가 책장 넘기는 소리로 들리네

몸에 닿은 소리는 내부를 거쳐 데워지고

신경을 따라 불빛을 깜박이다 사라지네

생각하네

초겨울 산사에서 동안거에 든 사람은

계곡의 어느 여백 속으로 옮겨 다니다 바람으로 숨는지

경을 읽다가 또 무슨 소리가 되어

산봉우리 끝으로 가서 자신을 버리는지

아니면 겨울의 땅 툰트라 지대에서

경을 외는 눈송이로 날아다니는지

산을 오르네 자작나무숲으로 가는 길은

희디흰 경의 뼈를 보는 일이네

높게 솟아 가지런히 동안거에 든 불국의 숲

그 산방에 조용히 귀를 대보는 일이네.

- 양용직, ‘자작나무숲으로 가는 길‘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예전에 본 영화 ‘닥터 지바고’는 애절한 사랑이야기도 그렇지만 눈덮힌 방대한 러시아 평원이 압권이었다. 거기에 끝없이 펼쳐지는 자작나무는 오래 잊혀지지 않을 마음속 풍광을 그려 놓았다. 자작나무가 시베리아와 북유럽 같은 지역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백석 시인의 ‘백화(白樺)’라는 작품을 읽으니 우리나라 북쪽 지방에서도 서식하고 있다. 휴전선 이남에 있는 자작나무 숲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식재한 나무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산골 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山) 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 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보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 백석, ‘백화’ 부분

자작나무는 껍질, 목재, 수액 모두를 인간이 이롭게 활용할 수 있다고 한다. 수령도 100년 남짓이어서 수 백 년 된 아름드리 고목을 보기 힘드는데 적당한 때에 떠나는 깔끔한 처신은 인간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인은 산사에서 자작나무 숲을 향하여 바위, 관목, 덤불을 거쳐 허위허위 산에 오른다. 속세의 욕망과 풍진을 떨쳐 버리려는듯 ‘경(經)’이라는 짧은 음절의 명사 반복으로 마음의 집중을 꾀한다. “... 산을 오르네 자작나무숲으로 가는 길은/ 희디흰 경의 뼈를 보는 일이네...” 라는 대목은 이 작품의 백미로 꼽힐만 하다. 눈에 보이는 흰빛 자작나무 껍질과 보이지 않는 희디힌 경의 뼈가 오버랩되는 가운데 동안거에 든 산방의 정적을 오감으로 느끼고 비로소 깊은 안도에 젖는 시인 그리고 우리 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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