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상고시대 중원 역사는 배달민족의 대륙 진출사
[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상고시대 중원 역사는 배달민족의 대륙 진출사
신화로 가려진 단군조선 - 하·은·주 3대(代) 교섭사③
  • 김탁
  • 승인 2017.09.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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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성 시안에 위치한 단군릉 추정 피라미드

[굿모닝충청 김탁 우리역사바로알기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전편에 이어서 이번 회에는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에 나타난 하夏나라와의 교섭사에 대한 자료를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탁 우리역사바로알기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한국상고사·민족사상 연구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대 정책대학원 고위정책과정 수료 Simple People Inc 대표

단군조선과 중원국가 간 전쟁과 교섭
1. “갑신원년(BC 2137) 단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몽골족이 바로 그의 후손 이라고 한다. 무자5년(BC 2133)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는 하夏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해 갔으며, 10월엔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 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임인19년(BC 2119) 하夏나라 왕 상商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는 식달息達에게 명령하여 람藍, 진眞, 변弁의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몽골과 우리 한국인은 인종적으로도 구별이 어려울 만큼 친연성이 뛰어납니다. 4세 단군 오사구의 동생인 오사달을 몽골칸(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했다고 하니 단군조선시대 초기부터 몽골은 단군조선 연방을 이루는 한 제후국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신서神書를 구해갔다”는 것은 단군조선의 사상과 문물에 관한 기록을 가져갔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지나 한족들이 이룩한 문명의 원류는 바로 동방 배달문명이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일례로 공자가 편찬한 <서전>에서 말하는 “홍범구주”는 고대 지나인들의 핵심사상을 정리한 것으로 은나라의 기자가 문왕에게 설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홍범구주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하늘(天)이라고만 한 것은 그 하늘이 바로 경천애인 홍익이화를 건국이념으로 하는 단군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람藍, 진眞, 변弁의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는 기사에 람藍은 단군조선 제후국의 하나인 람국藍國의 군사를 동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람국은 오늘날 하북성에 존재했던 고죽국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람후가 세운 나라입니다. 지나 문헌에서 동방족을 구이九夷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람이藍夷를 추가해서 십이十夷라고 하기도 합니다. 진眞, 변弁은 단군조선의 직할령인 진한과 변한으로, 람·진·변 3부의 병력을 동원해서 하나라를 정벌했다는 내용입니다.

2. “8세 단군 우서한 신해4년(BC 1990) 단제께서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국경을 나와서 하夏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크게 관제를 고쳤다.”

夏나라에 가르침을 전하다

3. “11세 단군 도해 정묘38년(BC 1854) 백성들 가운데 장정을 뽑아서 병사로 삼았다. 선사選士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서 나라의 위세를 보였다.”

<단군세기>에서 “신서神書를 구해갔다”거나 “선사選士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냈다”는 단편적인 기록이 보이고 있는 반면에 지나 측 문헌인 <산해경>은 웅상雄常에 관한 글에서 간결하지만 명쾌하게 동방 배달문명과 사상이 중원국가들로 흘러 들어갔음을 기록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산해경> 해외서경海外西經에 “넓은 황야에 큰 산이 있다. 이름하여 불함不咸이다. 숙신 씨의 나라는 백민白民의 나라에 있는데 북쪽에 나무가 있다. 이름하여 ‘웅상’이라고 한다. 위로 8대 제왕이 여기에서 웅상을 취했다.”(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肅愼氏國 在白民之國 北有樹 名曰雄常 先八代帝 於此取之)

위로 8대 제왕은 지나 역사의 삼황오제를 말하며, 이들 제왕이 모두 웅상을 취해갔다고 하는 것은 배달나라, 즉 백민지국白民之國이 숭상하는 환웅상을 가져갔다는 뜻입니다. 신라의 고승들이 서역에서 불상과 사리를 취해 오는 것처럼 지나인들이 배달민족의 종교사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수용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즉 중원지역의 지배자들이 배달민족의 문명과 사상을 수입해서 가져감으로서 지배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이것을 목적으로 중원으로 전파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백민白民이라고 함은 흰 옷을 숭상하는 사람들의 의미도 되겠지만 ‘배달민족=밝 사람’의 사음을 취해서 한자로 기록한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이와 같은 내용을 은폐하기 위하여 팔대八代를 입벌入伐이라고 고쳐서 무슨 말인지 모르게 원본을 왜곡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웅상에 관한 기록은 몇 군데 더 보이는데,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 따르면 “때에 큰 나무를 모시어 환웅의 신상神像이라고 하고 이에 경배한다. 신령스런 나무는 이를 웅상雄常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상常은 늘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는 기록으로 보아서 환웅천왕께서 늘 나무에 계신다고 믿고 경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삼한에 옛 풍속이 있는 바 모두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 지낸다.  땅에 제사 지냄을 방구方丘라 하고 돌아가신 아버님을 제사 지냄은 각목角木이라 하나니 산에 웅상雄常의 상像을 만듦은 모두 그에서 전래된 유법遺法 이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마치 불교신자들이 석가모니의 불상을 모셔 놓고 그의 가르침을 새기고 경배하는 오늘날의 습속과 같은 것입니다.

단군조선(고조선)의 강역

중원을 지배한 동이의 무력
4. “13세 단군 흘달屹達 갑오16년(BC 1767), 이 해 겨울에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걸桀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흘달 단제께서 읍차邑借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의 탕湯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고 몰래 신지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군을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 기岐의 땅에 웅거하여 관청을 설치하였다.”

걸桀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으로서 은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주紂왕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걸왕의 구원요청으로 흘달 단군께서 지원군을 보내서 하나라를 구원하니 걸왕에 반기를 들었던 은나라 탕湯왕이 사죄하였다. 그러나 위기를 모면한 하나라 걸왕이 군사지원에 대한 약속을 깨자 오히려 하나라를 정벌하고 오늘날 섬서성 지역인 빈, 기 지방까지 깊숙이 진격하여 점령했다는 내용으로 동이무력의 강성함을 실증하는 기록입니다.

“견군을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 기岐의 땅에 웅거하여 관청을 설치하였다”는 내용에서 견군이라 함은 구이의 하나인 견이(한자로는 田+犬으로 씀), 혹은 오가 가운데 구가狗加의 군대라고 유추해 볼 수 있겠지요.

관중關中이라는 표현은 중국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명으로 조금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겠습니다. 관중은 지금의 섬서성, 진秦의 옛 땅으로 일명 4새塞라고도 하고 동쪽은 함곡관으로 사방이 험준한 새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관중이라고 합니다. 이 관중 지방 안에 빈, 기 땅이 있고 빈은 주周나라의 조상인 공유가 세웠다고 하는 옛 나라이름으로 섬서성 순읍현의 서쪽이고 기는 주나라의 구읍으로 섬서성 기산현의 동북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국인들이 그들의 적통으로 인식하는 주나라가 일어난 곳이 관중이요 빈, 기 지방입니다.

한나라 유향劉向이 찬한 <설원說苑>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치려고 하므로 재상 이윤이 가로대 “치지 마십시오. 조공의 양을 줄여 그의 거동을 보고 치십시오” 하였다. 걸왕이 노하여 구이九夷의 군사를 일으키니 이윤이 가로대 “정벌할 때가 아닙니다. 저쪽이 아직도 구이의 군사를 움직일 수 있으니 이는 잘못이 우리에게 있음 입니다” 하므로 탕 임금이 마침내 걸 임금께 사죄하고 다시 조공을 바치니라. 이듬해에 다시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니 걸왕이 구이의 군사를 동원하려했으나 구이의 군사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윤은 “됐습니다. 치십시오” 함에 탕 임금은 걸왕을 쳐 남쪽으로 도망치게 했다.

은나라 재상 이윤은 주나라 건국을 도운 강태공과 함께 지나 고대사에서 명재상으로 추앙받는 인물인데 이윤이 탕왕에게 간하는 대화 내용에서 당시에 구이의 군대가 가지는 위상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구이의 군사’라고 함은 단군조선과 단군조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중원지역의 제후국들이 동원할 수 있는 군대를 의미합니다. 단군조선의 무력이 중원의 권력향배는 물론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로 강성했던 것입니다. 하나라와 은나라는 단군조선의 영향력 아래에서 중원 땅에 일어선 제후국이었던 것입니다.

<규원사화>에도 <단군세기>와 <설원說苑>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보이고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이 때에 단군조선 3대 가륵왕이 장군 식달을 보내 남후와 진번후의 군사를 거느리고 하夏를 공격하였다.”

“단군조선 4대 오사구왕이 하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화해하고 서로 통교하였다.”
“단군조선 6대 달문왕이 산동지방에서 하의 세력을 물리쳤으며 그 국경이 황해에 면하게 되었다.”

단군조선 15대 벌음왕 때에 이르러 하나라가 상商(은殷나라)에 곤란을 당하여 원병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단군조선이 그 요청을 물리치고 상商나라를 도와 그 창업의 완수에 이바지했던 것입니다.

<후한서> 동이전의 기록에도 “걸왕이 폭학하여 이족들이 침노해 왔다(桀爲暴虐 諸夷內侵)” 라고 간략하게 기록했는데 여기서 “제이내침諸夷內侵” 이라는 표현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이 실정하여 그 국세가 쇠퇴하자 단군조선과 그 제후국들이 이 빈, 기 지방, 즉 오늘날의 섬서성 지방에 진출한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 단군조선인의 중국본토 내 거주가 크게 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처럼 상고시대 중원의 역사는 배달민족의 지속적인 대륙진출사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개괄하면 우왕이 하나라를 건국한 것은 단군조선의 부루 태자로부터 치수방법을 터득하여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고, 더욱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도산국녀에 장가를 듦으로써 그 후광을 입어서 하나라를 창업하게 된 것입니다. <단군세기>, <태백일사>, <규원사화>에 자세하기 기술한 것처럼 하나라는 단군조선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제후국이었으며, 우세한 동이무력으로 하나라를 자주 정벌하고 산동성과 산서성, 섬서성을 점령하고 고조선족이 이주하여 영향권 아래에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夏는 크다, 밝음을 뜻하는 우리말
지나 서방족을 부르는 명칭이 한漢족으로 굳어지기 전에는 화하족華夏族이라고 스스로 호칭했는바 이것은 하나라를 자신들의 기원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夏는 한자로 여름이라는 뜻이 있지만 국호에 계절을 뜻하는 글자를 사용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당시만 해도 배달민족의 태양숭배사상이 동북아와 중원지방의 지배적인 사상이었기 때문에 우리말 해(日의 고어인 ‘하, 와’를 음사해서 자신들의 국호를 지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민족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환桓, 한韓(=밝음)과 같은 의미로 하夏나라의 국명을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라를 건국한 우왕은 그 출자가 요임금과 같은 북방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우왕이 동이계인 순임금을 제거하고 하나라를 건국하고 나서도 실질적인 제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동이계인 백익伯益이 제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은 하나라 역시 동이계로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후일에 다시 분석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은 압록강 이남의 반도역사만 우리 역사로 알고 있지만 상고사로 올라 갈수록 우리 역사는 대륙을 무대로 하고 있었음을 이해하고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라에 이어서 등장한 은나라와의 교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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