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의 몽골·바이칼 기행] ② 환상 깨진 시베리아 횡단열차
[김선미의 몽골·바이칼 기행] ② 환상 깨진 시베리아 횡단열차
감히 공문서를 훼손? 승차권 오류 바로잡다가 중범죄자 취급 당해
  • 김선미 언론인
  • 승인 2017.09.17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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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은커녕 고작 460km, 8시간 달리는 울란우데-이르쿠츠크 구간만으로 만족해야 했던 시베리아횡단열차. 새벽 울란우데역.

[굿모닝충청 김선미 언론인] 지난 7월, 처음으로 DMZ 기행을 다녀왔다. 도라산역에 들렀다. ‘타는 곳-평양 방면’이라는 안내판에 눈이 아렸다. 마침 시베리아횡단열차 여행을 앞두고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유라시아횡단철도 노선 지도와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의 결과로 2003년 경의선 철도를 연결했다는 안내문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우리에게도 서울에서 열차를 타면 평양 신의주를 거쳐 중국 러시아를 넘어서 유럽까지 갈 수 있는 그런 날이 올까.

지금은 갈 수 없는 유라시아횡단철도 노선 지도, 경의선 연결 내용을 전하는 도라산역의 안내문, 타는 곳 평양방면이라는 표지가 분단현실을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바이칼의 도시 이르쿠츠크까지 몽골종단열차(TMGR)와 러시아 울란우데에서 합해지는 시베리아횡단열차(TSR)를 탈 계획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한 시절 로망이었던 시베리아횡단열차인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 6박7일의 여정은 무리라 해도 25시간쯤 걸리는 1박2일의 열차는 타야 하지 않겠느냐며 호기롭게 잡은 일정이었다.

모스크바 시간 0시4분, 울란우데 시각으로 5시4분에 정확히 출발한 열차는 오후 1시에 이르쿠츠크 역에 도착했다.

 육로로 몽골-러시아 국경을 넘으면서 시베리아횡단열차 탑승은 바이칼호수를 지나는 울란우데에서 이르쿠츠크까지로 만족해야 했다. 400km가 넘지 않으면 거리도 아니라는 광활한 대지에서 고작 460km, 8시간을 타고 시베리아횡단열차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그럼에도 여행 중 가장 진을 빼게 했다. 200m를 5시간씩이나 기다리며 통과한 국경넘기 보다 더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

유라시아횡단철도, 경의선 연결해 서울서 유럽까지 갈 날이 올까

이르쿠츠크시는 시베리아에서 꽤 큰 도시임에도 이곳에서 내리는 승객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시베리아횡단열차표를 구입하는 일부터가 간단치가 않더니 끝내는 사단이 나고야 만 것이다. 디지털 문맹자나 다름없는 이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무려 3일에 걸쳐 e-티켓 예약을 완료했을 때의 그 뿌듯함마저 무참히 얼어붙게 했다. e-티켓은 비행기의 탑승권처럼 역에서 직접 승차권으로 발권해야 한다. 알탄 불라크의 카페와 국경통과 과정에서 경험한 느려도 너무 느린 러시아식 일처리에 출발 당일 발권하는 것이 왠지 불안했다. 더구나 새벽 5시에 출발하는 열차였다. 미리 발권하기로 했다.

울란우데역. 느린 일처리에 대한 불안감으로 승차권을 미리 발권했으나 기어이 사단이 나고 말았다.

 울란우데 역 창구에서 승차권을 받자 러시아 경험이 많은 일행 중 한 분이 이름, 출발일시 등등 열차표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라고 했다. 사실 뭔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승차권에서 이름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일단 훑어보니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역사를 나오기 전, 그래도 혹시나 해서 다시 살펴보니 아뿔싸! 이름이 KIM SE로 인쇄된 것이 아닌가. 다른 한 명도 철자가 뒤바뀌어 있었다.

국기기관의 공문서에 흠집을 냈다고 닦달을 당하고 재발권 받은 문제의 승차권.

 쉽게 생각했다. 여권과 e-티켓이 있으니 재발권 하는 일이 뭐 그리 대수랴 싶었다. 열차표에 동그라미를 치고 여백에 영문 이름을 크게 썼다. 이번에는 틀리지 말라고, 창구 직원이 잘 알아보도록 한 나름의 배려였다. 이 일이 ‘국가기관의 공문서를 감히 훼손한 중범죄(?)’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줄을 다시 선 끝에 이름이 잘못됐다며 승차권을 내밀었더니 창구 직원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황당함을 넘어 분에 못이기는 모습이었다. 누가 그랬냐? 왜 그랬냐? 러시아어를 알아들을 턱이 없지만 닦달하는 모양새가 곧 보안관이 나타나 잡아갈 듯한 분위기였다.

표 한 장 사는데 무려 20분씩, 고객도 직원도 서두르는 법 없어

러시아에서는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제서야 표 한 장 사는데 무려 20분 이상 소요되는 이유를 알았다. 우리 앞에서 표를 사던 한 여성은 우리 같으면 뒤통수가 뜨거워 좀 서두를 법도 한데 직원에게 묻고 또 묻고 표를 받아들자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심지어 어디론가 전화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창구 직원은 얼굴색 한 번 변하지 않고 미동도 없었다.

모스크바행 횡단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이 사람들도 승차권 구매할 때 묻고 또 묻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을까.

 100루블(약 2,000원)의 벌금을 물고 재발권한 열차표를 받아들었을 때는 무려 2시간이나 지나간 후였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여권에 적힌 이름을 제대로 입력 못한 창구 직원인, 자신의 잘못 아닌가. 그렇다고 정보가 담겨 있는 QR코드나 바코드를 훼손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쩌랴, 그 나라 법이라는데... 오만정이 다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4인1실의 쿠페 객차의 편복도. 한 사람 지나다니기도 좁지만 바닥에는 카펫도 깔려 있다.

 열차를 타던 날 새벽, 동 트기 전으로 어둑어둑한데다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돋보기를 쓴 객차 담당 승무원을 보니 승차권과 여권을 일일이 대조하며 영문 철자를 그토록 철저히 확인했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일행이 예약한 좌석은 4인 1실의 2등석 쿠페였는데 재발권 하는 바람에 일행이 흩어지게 됐다.

2층 침대 두 쌍이 코 닿을 듯 붙어있는 1평 남짓한 밀폐된 공간에서 국적도 성별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끼어 여행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된 것이다. 더구나 장기노선이고 새벽이어서 그런지 모두 취침 중이었다.

예의와 체면 지켜야 하는 관계라면 4인1실 쿠페는 절대 사양

일행 모두가 열차요금에 포함된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칸으로 이동하며 방을 비우자 승무원이 어마하게 큰 자물쇠로 밖에서 문을 잠갔다,

 성인 5명이 무릎을 맞대고 앉은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쿠페 좌석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폐소공포증이 없어도 답답함이 내리 눌렀다. 전날 울란우데 시내 투어를 무리하게 한데다 꼭두새벽에 나오느라 거의 잠을 못잔 탓에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민망했다.

제공된 식사는 밍밍한 닭고기덮밥과 굳은 빵, 홍차 한 잔이 전부였으나 홍차 잔 홀더는 나름 운치 있다.

 적나라한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도 괜찮은 사이라면 몰라도 최소한의 예의와 체면을 지켜야 하는 관계라면 절대로 쿠페를 권하고 싶지 않다. 1박2일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차창 밖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에 춤추듯 흔들리는 자작나무숲, 작은 마을, 이름을 알 수 없는 역들이 몽환적인 모습으로 흘러갔다.

빗발이 내리치는 차창을 통해 본 바이칼호.

 “바이칼이다” 승무원에게 사정해서 애써 바꾼 덕분에 함께 있게 된 좌석 대신 답답함을 피해 복도에 나가있던 일행 중 한 명이 외쳤다. 빗발이 내리치는 흐릿한 차창을 통해 본 바이칼호는 파도가 치는 거대한 바다였다. 일순, 지구의 푸른 눈이라는 별칭처럼 투명하고 푸른 물빛이 아쉬웠지만 비오는 날의 회색빛 바이칼도 나쁘지 않았다. 바이칼의 두 풍경을 본 셈이다.

비바람 부는 차창 밖으로 자작나무숲, 작은 마을, 역사들이 몽환적인 모습으로 흘러갔다.
슬류단카역.
대부분은 사진을 못 찍게 하는데 식당매점의 젊은 직원은 기꺼이 포즈까지 취해준다.
한 여름인데도 바이칼호 주변 도시들은 꽤 쌀쌀했다. 8월10일 오후 이르쿠츠크의 기온.

※ 이 글은 <세종의 소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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