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 은(殷)나라는 동이계 상(商)족이 건국… 단군조선 영향권 아래 존재
[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 은(殷)나라는 동이계 상(商)족이 건국… 단군조선 영향권 아래 존재
신화로 가려진 단군조선 - 하·은·주 3대(代) 교섭사 ④
  • 김탁
  • 승인 2017.10.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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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자

[굿모닝충청 김탁 우리역사바로알기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김탁 우리역사바로알기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한국상고사·민족사상 연구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대 정책대학원 고위정책과정 수료 Simple People Inc 대표

1. “은나라왕 소갑小甲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했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단군세기에 15세 단군 대음 경진원년(BC 1661)조에 최초로 나타난 단군조선과 은나라의 교섭기록입니다. 앞장에서 13세 홀달단군 때에 은나라 사람 탕湯이 하나라를 정벌하고 은나라를 건국한 기사를 소개했는데 소갑小甲은 은나라 7대왕에 해당됩니다.

은나라는 갑골문, 제사, 은허 유적지등으로 중원문명의 뿌리를 이룩한 나라로서 단군조선과의 교섭사를 논하기 전에 먼저 그 탄생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교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은殷이라는 명칭은 19대 반경왕이 은허 유적지로 알려진 현재 하남성 안양시로 천도함으로서 얻은 이름이고 초기에는 수도를 박亳으로 하여 건국한 상족의 이름을 따서 상商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흔히 은상殷商이라고도 합니다. 서울인 박亳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요령성 서부와 하북성 동북부로서 이 지역은 고대 동방배달민족의 터전으로 상족이 동이계라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일설에는 하남성 낙양시 일대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박의 위치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는 것은 종족이 이동하면서 지명도 함께 가지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은탕殷湯의 시조인 설이 순임금으로 부터 봉함을 받은 곳이나 탕이 은나라를 건국한 곳이나 모두 박이라고 부릅니다. 탕왕이 건국한 지역은 하남성의 박이고 시조인 설이 봉함을 받은 곳은 하북성, 요령성 서부 일대의 박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한자 박亳은 우리말 ‘밝달’과 같이 밝음, 태양을 숭상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 역사학자들도 상족이 “북쪽에서 내려왔고 멸망 후에 다시 북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으며, 상商이라는 글자 자체가 우주의 절대자인 상제와 조상에 대한 제사행위를 나타나는 글자로서 상족은 배달민족의 경천 조상숭배사상을 계승한 동이계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은나라 역대왕의 호칭은 소갑小甲, 태갑太甲, 태무太戊, 소을小乙 등 배달국에서 확립된 천간지지天干地支 개념의 10간干 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60갑자라 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10간 12지는 배달국 시대에 확립된 숫자개념으로 상족은 배달민족의 한 분파로서 중원문명의 모태가 되었다고 봅니다.

은나라 건국시조인 탕湯의 조상은 설契인데 설은 삼황오제의 한분인 제곡의 차비이자 유웅싸족의 딸인 간적簡狄이 제비의 알을 먹고 낳았다는 난생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는 모계사회인 관계로 제곡의 차비인지는 불명확하나 모계가 유웅씨(곰족)이고 부계는 난생설화족인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족이 동이계임을 증명하는 몇 가지 증거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가. 시조 설을 현왕 환발桓撥이라고 부른 점. 시전 현조玄鳥 1장에 “현왕玄王이 환에서 발하여 소국을 받으매 이를 잘 다스렸고 대국을 받으매 이를 잘 다스렸다(玄王桓撥 受小國是達 受大國是達)”는 기록이 있는 바 현조는 검은색의 제비를 말하는 것이고 환발桓撥은 다름 아닌 밝달의 한문식 표기로 볼 수 잇다는 것입니다.

나. 백색을 숭상하고 최고계급의 복장으로 했다는 점. 복색상백(服色上白)

다. 봉조鳳鳥문화를 숭상한 점, 즉 제비알을 먹고 잉태했다는 설화에서 보듯이 은상은 조이계 동방족으로 볼 수 있다는 점.

라. 시조 설의 어머니인 간적은 유웅국, 혹은 강대한 세력인 유아씨의 딸이라고 하고 간적을 잉태시킨 제비알족(현조씨족)은 동방족의 임금인 소호小昊의 사관이었다는 점.

마. 은나라시대 발굴된 청동기 유물에 새겨진 ‘잔盞’은 우리말 술잔을 뜻하는 글로서 한자로는 배盃라고 함.

설契은 순임금 때에 우사공의 치수를 도운 공적으로 순임금에 의해 상商지역에 봉해졌고 자씨 성(子姓)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에 우왕이 순임금을 제거하고 하왕조를 설립한 후에는 하나라의 제후국으로서 시조로부터 14대 탕왕에 이르기 까지 여덟 번을 서울을 옮겨 다니다가 탕왕에 이르러서 하나라의 마지막 걸왕을 정벌하고 상나라를 건국하게 되었음은 앞장에서 전술한 바와 같습니다.

은나라는 마지막 30대 주왕에 이르기까지 약 600여 년을 존속했는데(단대공정에 따르면 654년)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고 중국의 단대공정에 의해서 서기전 1600년에 건국하고 서기전 1048년에 멸망한 것으로 공식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는 약 120년 정도의 오차가 있고 단군세기의 연표와도 그 정도의 연대차이가 있음을 감안해야합니다.

은나라 영역. 초기에는 1000리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2. 다시 단군조선과의 교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 “은나라왕 소을小乙(BC 1349-1339)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21세 단군 소태 갑진원년(BC1337) 조에 보일 때까지는 특별한 교섭사항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협력으로 하나라를 정벌하고 들어선 은왕조와 단군조선이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음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수도를 은허로 옮긴 반경왕의 동생인 무정이 집권하고 부터 단군조선과의 무력충돌이 발생하는데 이것은 무정왕 때에 은나라가 쇠퇴기를 벗어나서 중흥기에 들어섰음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에 단군조선 역시 대외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이니 만큼 두 세력 간의 다툼은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소태 단군 때인 “경인 47년 (BC1291) 은나라 왕 무정武丁(BC1339-1280)이 귀방鬼方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令支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는 기사에서 처음으로 은나라와 무력충돌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어서 귀방과 관련한 기사가 등장하는데 “임진 49년(BC 1289) 개사원의 욕살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중략)… 마침내 이를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도록 하였다.”

여기서 은나라왕 무정과 개사원 욕살 고등이 귀방을 쳤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그만큼 귀방이 위협적인 요인으로 등장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귀방은 원래 방위를 나타내는 말로서 은나라에서 보면 북방, 단군조선에서 볼 때는 서북방에 위치한 족속으로 은나라 때에는 귀방이라고 불렀고 이후 주나라 시대에는 훈육 혹은 험윤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귀방 험윤 훈육 흉노는 다 같은 지역을 뜻하는데 사마천의 <사기>, <후한서>, <전국책>등에서 흉노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서 현재는 흉노로 통칭되고 있습니다.

황하강 상류가 북상하다가 다시 꺾여 내려오는 내몽골 오르도스 일대를 발원지로 하며 융戎, 적狄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흉노는 지나족들이 이민족을 비하하는 뜻으로 ‘시끄러운 놈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원래는 슌누, 한자로는 순유淳維라고 합니다. 슌누, 순유는 북방 유목민족이 스스로를 ‘천손’이라고 부르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지나족들이 그 뜻을 비하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오늘날 지명으로 볼 때에 무정이 공격했다는 귀방은 청해성 일대의 서융족 혹은 섬서성 일대의 북적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은나라의 갑골문자에도 귀방이 나타나는데 환단고기의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에 부합함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위에 기사에서 “은나라 왕 무정武丁(BC1339-1280)이 귀방鬼方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令支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는 것은 은나라 세력이 서북방 귀방(흉노)을 정벌하고 여세를 몰아서 동북방인 색도 영지 등을 공격해서 단군조선을 자극함으로서 단군조선에게 패하였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지는 임승국 교수의 주석에 따르면 산융의 속국인데 하북성 천안현 서쪽에 있는 나라로서 영지, 산융, 고죽국 등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주서>에서는 불령지不令地, <사기>에서는 이지離地라고 했는데 이것은 모두 영지를 가리키는 말로 보입니다.

이들 영지 산융 고죽은 춘추전국시대까지도 존속하면서 연나라 등 주나라의 북방을 위협했는데 제나라 환공이 연합군을 편성해서 공략함으로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공자가 높이 사서 “제환공이 피발과 좌임을 정벌했다”라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피발은 머리를 길게 따서 내리는 관습을 의미하고 좌임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으로 배달 동방족의 대표적인 관습입니다.

귀방은 은나라 왕 무정의 정벌에 이어서 단군조선의 우현왕인 개사원 욕살 고등의 침공을 받아서 멸망했다는 기사에서 보면 단군조선의 영향권 내에 들어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을미 52년(BC 1286) 우현왕 고등이 죽으나 그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고 했고 색불루는 21세 소태단군에 이어서 드디어 22세 단군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서북지역의 강력한 유목세력이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 입니다.

또한 색도라는 지명은 색륜索倫으로 볼수 있는데 “몽골인이나 중국인은 쏘롱Solong이라고 발음하는데 쏠롱고Solongo라고 하여 색륜산 너머 북만주 일대에 사는 조선, 숙신족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은나라와 단군조선은 오늘날 하북성 일대와 흥안령 산맥 서쪽 내몽골 일대에서 세력다툼을 벌인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중국 고대사라고 하면 무조건 황하강 중류지방이 중심이라고 상상하지만 실제로 동북아 고대사의 중심지는 하북성, 요령성 서부 내몽골 일대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 입니다. 지나 고대사로 알고 있는 삼황오제의 역사 또한 이 일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지역이 오늘날 홍산문명이 출토되는 지역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하남성 안양시 은허 유적지

3. 22세 색불루 단군의 은나라 정벌
“병신원년(BC 1285) 단제 명하사 녹산鹿山을 개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廟<사당>를 세우고 (할아버지)고등왕을 제사 지냈다. 11월 몸소 구환의 군대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 부셨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의 백성들을 회대淮垈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쳤다.

을묘20년(BC1260) 이 때에 남국(구이의 하나)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쫒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골奄瀆忽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岐(오늘날 섬서성 일대)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임금(황皇)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 이남의 땅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서북으로 귀방을 정복하고 서남으로는 은나라를 정벌하고 황하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았으며 남쪽으로는 산동성 이남 회대지역까지 진출하여 단군조선의 위세가 절정을 이루는 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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