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쉽게 읽히지만 무엇인지 들키지 않는 시,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시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쉽게 읽히지만 무엇인지 들키지 않는 시,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시
  • 이규식
  • 승인 2017.11.04 0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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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히지만 무엇인지 들키지 않는 시,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시

그는 자꾸 내 연인처럼 군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와 팔짱을 끼고 머리를 맞대고

가만히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아는 사람을 보았지만 못 본 체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지만 확신은 없다

아파트 단지의 밤

가정의 빛들이 켜지고 그것이 물가에 비치고 있다 나무의 그림자가 검게 타들어 가는데

이제 시간이 늦었다고 그가 말한다
그는 자꾸 내 연인 같다 다음에 꼭 또 보자고 한다

나는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고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잠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 황인찬, ‘실존하는 기쁨’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특히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우는 문학작품 감상과 이해는 해부와 정답찾기에 치우쳐서 글의 맛과 멋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고 그 결과 대중의 문학에 대한 관념과 인상을 획일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시 한 편을 읽고 각자 느낌을 토로하면서 서로의 차이점을 견주어 보고 거기서 드러나는 공통점이라든가 차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다양한 담론이 사라진 현장에서 시는, 문학은 위축된다.

그런 교육 풍토의 교실을 벗어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아직 20대인 황인찬 시인의 등장은 주목할만 하다. 그의 시를 바라보는 주관은 확고하다. 어느 인터뷰에서 “누구나 다 아는 걸 확인시키는 일은 시가 하지 않아도 되므로 사람들이 믿는 것을 다시 한번 의심하게 하고 자극 주는 것이 시의 역할”이라고 밝힌 것처럼 젊은 시인의 보편적이지만, 대단히 독창적인 시 창작관은 지금 우리가 ‘시’라는 이름으로 읽고 있는 숱한 ‘알고 있는 이야기, 익숙하고 친근한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노력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가을이 오면 낙엽을 보며 삶의 무상함을 생각하고 봄꽃에서 생명의 약동과 환희를 느끼는 일은 굳이 시인이 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수월하다. 그러므로 시인은 익숙한 대상을 서먹서먹하고 낯설게 만드는 일에 노력해야하고 그리하여 시와 시 아닌 것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품을 써야한다는 것이 황인찬 시인의 지론이다.

위에서 인용한 작품 ‘실존하는 기쁨’ 역시 철학사조로서의 실존주의나 대표적인 철학자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 그리고 실존의 삶은 어떠한 구체적 양상을 띠어야 한다는 등 상식적인 내용에서 한참 비껴나 있다. 그럼에도 어느 젊은이의 일기나 독백을 읽듯 술술 읽히지만 시인이 말하려는 바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시인의 표현처럼 쓱 읽히고 한 번에 읽히는 시, 텍스트는 어려움 없이 수용되지만 무엇인지 들키지 않는 시를 쓰고 싶다는 의지가 황인찬 시인의 작품을 한 번 다시 읽어보게 만든다. 독자들은 작품 제목이 왜 실존하는 기쁨인지, 아파트 단지에서 애인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한 남녀의 좀 답답해 보이는 언행이 왜 실존과 연관되는지 알 듯 모를 듯하다. 두 번 세 번 읽을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그럴 때 이런 경향의 이야기구나 라고 느끼면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 다르게 읽을 수 있고 처음에는 이게 답인 듯 싶었는데 다시 생각하니 다른 것이 답이 될 수 있는, 그리하여 딱 부러지게 단정짓기 어렵고 애매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시가 오래 사는 길이라는 것이다. 시가 있어야 할 곳은 생경함과 놀라움의 자리, 공감의 반대편에서 끊임없이 여러 생각을 만들어 내는 자리라고 한다. 지금 성실하게 군복무 중인 젊은 시인의 무운과 시심이 나날이 강건해지고 풍성해지기를 함께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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