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① 백제 숙원 해결한 나제동맹, 칼이 되어 돌아오다
[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① 백제 숙원 해결한 나제동맹, 칼이 되어 돌아오다
  • 이재준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7.11.12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재준
예비역 육군대령
영남대 한국군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서기 660년 백제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계백장군이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전투한 7월 9일 이후 10여일 만인 7월 18일 항복하였다. 그러나 백제군과 백제유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663년 11월까지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부흥전쟁을 이어갔다. 이를 지금까지 우리는 부흥운동이라고 불러왔으나 사실은 부흥전쟁이었다.
이러한 백제와 나당연합군의 전쟁, 그리고 백제부흥전쟁은 그동안 수많은 연구업적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럽고 정체되어 있는 상태이다. 문헌사학·역사지리학·음운학·고고학 등 다양한 방법론을 적용해 연구되긴 했지만 유독 군사학적인 측면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백제가 자신들의 마지막 역사를 남기지 못했으며, 승자인 당나라나 신라의 사료밖에 없기 때문이다. 1350여 년의 세월이 지나며 지형과 지명도 수없이 바뀌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연구방법과는 다른 전쟁의 본질을 고려한 군사학적 방법에 의한 객관적 검증을 통해 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아울러 백제의 마지막 전쟁사에서 오늘날 우리의 안보현실에 비추어 그 교훈을 알아보고자 한다.
본고는 필자의 ‘백제의 멸망과 부흥전쟁사’(경인문화사)라는 학술서 내용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학술서는 일반적으로 논증하여야 하는 부분이 많고 딱딱하여 독자들이 읽기에 다소 어려운 부분이 많다.
이에 학술서 내용을 좀 더 알기 쉽게 재구성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함이 본 연재의 목적이다. 또한 역사적 사실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상기시켜 오늘날 남북관계나 미·중·일 등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아울러 본 연재가 근거로 하고 있는 ‘백제의 멸망과 부흥전쟁사’에서는 인용근거를 명시하였으나 본 연재에서 지면관계상 인용근거를 생략한 점을 양해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백제왕실 계보(자료 : 한국사정보사이트 ‘Histopia’)

백제가 남쪽으로 온 이유
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과 교훈을 살피려면 우선 백제의 기원부터 정확히 알아야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졸본(卒本) 부여왕(扶餘王)이 북부여에서 온 고주몽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 둘째딸 소서노(召西奴)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고주몽과 소서노 사이에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얼마 되지 않아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그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낳은 예씨(禮氏)의 아들이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이에 비류와 온조는 용납되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소서노와 함께 열 명의 신하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비류는 미추홀에 정착하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정착하였다. 이때가 B.C. 18년이었다. 미추홀에 정착한 비류는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수가 없어 일찍 죽었다”고 한다. 둘째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건국한 백제는 서기 660년까지 존속되었다.

더불어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다음과 같은 다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다. 어머니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 소서노가 처음 우태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가 죽자 홀로 살다가 고주몽과 결혼하였다.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예씨의 아들 유류(孺留)가 찾아오자 비류와 온조는 소서노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패수(敗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한편 동명(東明)의 자손 구태(仇台)가 대방(帶方) 옛땅에 나라를 세우니 한(漢)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로써 구태의 아내를 삼게 하였는데 그 뒤에 동이(東夷)에서 강국이 되었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른다.”

‘삼국사기’의 원 기록에 의하면 비류와 온조의 성씨는 고씨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백제왕의 성씨는 부여씨이다. 백제왕의 성씨가 부여씨라고 하면 ‘삼국사기’가 다른 일설의 내용이라고 소개한 기록이 맞을 수도 있다. 여하튼 백제의 시조 비류와 온조는 만주지역 부여국에서 하남 위례성으로 고구려를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왔다.

당연히 고구려에 대한 원한이 있었을 것이다. 이에 백제는 전성기를 구가하는 4세기인 371년에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그러나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백제 개로왕이 죽고 475년 한성이 함락된다. 결국 백제는 약 500년 도읍지 한성을 버리고 남쪽인 웅진(공주)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웅진에서 63년간 두 번이나 왕이 시해되고 반란이 있었다. 고구려에게 패하여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군사력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웅진에서의 혼란으로 538년 또다시 남쪽인 사비(부여)로 천도하게 된다. 백제가 남쪽으로 남쪽으로 오게 된것은결국 고구려때문이었다.

백제의 수도는 한성(BC18~475)→웅진(475~538)→부여(538~660) 등 계속하여 남쪽으로 내려왔다.

고토회복을 위한 나제동맹
남쪽으로 내려온 백제의 숙원은 당연히 북쪽 고토회복이었다. 특히 500년 가까이 통치했던 한강유역 회복은 그 어떤 정치·외교적 사안보다도 우선하는 업무였다.

427년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진정책을 펴자 백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433년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 나제동맹은 서로 군사를 지원하여 응원하기도 하며 왕실은 상호 사돈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551년 양국 군대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라는 한강 상류지역 동북10군을 차지하였고, 백제는 한성과 한강하류 지역 6군을 차지하게 된다. 백제는 76년 만에 그동안 숙원이었던 고토 한강유역을 회복하였다. 433년 이래 맺어온 나제동맹이 정점인 극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신라의 진흥왕이 553년 백제의 한강유역을 기습적으로 점령하여 주를 새로이 설치하고 아찬(孺留) 김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백제의 숙원이었던 고토회복의 기쁨이 2년 만에 무너지는 사건이었다. 결국 이와 같은 신라의 배신행위로 433년부터 120년간 이어져왔던 나제동맹은 결렬되고 백제와 신라는 철전지 원수가 된다.

107년간의 신라 응징전쟁
이때부터 백제의 대외정책은 고토회복보다도 신라에 대한 응징이 우선하게 되었다. 백제는 그 이듬해 554년 가야 및 왜와 연합군을 결성, 태자 여창과 좌평 등 약 3만여 명이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전세는 신라에게 불리하여 다른 지역에서 증원군이 동원되었다.

백제 성왕(부여 정림사지 전시관 소장, 표준영정 75호, 권오창 그림)

이 무렵 성왕이 태자 여창이 여러 날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며 신라를 공격하는 것을 격려하기 위하여 호위기병 50기만을 데리고 전쟁터로 출동하였다. 하지만 성왕은 구천(충북 옥천)지역에서 한강유역의 신주(新州)로부터 출동한 군주 김무력의 비장 삼년산군(三年山郡) 고고간도(高干都刀)의 매복에 걸려 살해당하였다. 

백제의 성왕이 복병에게 살해당하게 되자 신라를 공격하던 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전쟁에서 백제군은 좌평 4명을 비롯하여 장병 2만 9600명이 전사하였다.

백제의 성왕은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라고 고친 왕이다. 성왕은 한강유역을 되찾았던 지혜와 식견이 영명한 왕이다. 영명한 왕을 잃은 백제의 슬픔은 더욱 커졌고 신라에 대한 적개심은 더 깊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백제는 멸망할 때까지 107년간 신라와 치열한 전쟁을 이어가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횟수는 총 25회이며, 신라가 백제를 먼저 공격한 것은 4회이다. 평균 4년에 한번 꼴로 전쟁을 한 셈이다. 한 집안으로 보면 4대조 할아버지부터 고손자까지 모두 전쟁에 참여한 셈이다.

연속된 전쟁으로 백제인들의 신라에 대한 적대감이 누적되어 갔다. 그리고 무왕 이래 21회 신라를 침공하여 12회나 승리하는 등 백제는 어느 정도 자신감과 승리에 도취되어 신라에 대한 침공을 계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뿌리 깊은 적대감에 의한 신라응징 전쟁을 계속한 결과 660년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초래하게 되었다.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워야
숙적과 동맹은 시대에 따라 대상국과 이해관계에 따라 변화한다. 120년을 지속했던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제는 신라의 기습적인 배신행위를 간파하지 못했다. 백제가 오래 지속된 동맹관계를 전적으로 믿은 결과이기도 하고, 신라가 한강유역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탈취하고자 한 주도면밀한 계획이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백제는 신라의 한강유역 기습탈취 행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1953년 10월 1일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변영태와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워싱턴 D.C.에서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였다.

세상 모든 만물이나 이치가 끊임없이 변화하듯 국제관계도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했어야 했다. 그리고 동맹이 오래되고 지속되고 정점에 달할 때 변화의 가능성을 감지하고 대비했어야 했다. 결국 동맹을 깬 신라의 배신적 행위를 응징하고자 107년간 이어간 보복전쟁의 결과가 백제 멸망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백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근원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재위 때(1873-1901) 총리를 두 번이나 지낸 헨리 존 템플 파머스턴의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 오로지 우리의 이익만 있을 뿐이다”라고 한 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현재 우리의 안보상황과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남북으로 대치된 상황에서 한미동맹이 커다란 전쟁억지력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국가의 존립이 걸린 문제는 동맹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여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 지킬 힘을 가졌다 해도 동맹유지는 필요하다. 한 나라의 경제가 전쟁대비를 위한 전력구축에 몰입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억지를 위해서는 동맹의 힘이 더해져야 더 큰 억지력으로 작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굿모닝충청(일반주간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0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다 01283
  • 등록일 : 2012-07-01
  • 발행일 : 2012-07-01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창간일 : 2012년 7월 1일
  • 굿모닝충청(인터넷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7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아00326
  • 등록일 : 2019-02-26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굿모닝충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굿모닝충청.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mcc@goodmorningcc.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