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엄·서·회’ 단군조선 제후국, 진시황 통일 직전까지 번성
[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엄·서·회’ 단군조선 제후국, 진시황 통일 직전까지 번성
신화로 가려진 단군조선 - 하·은·주 3대(代) 교섭사 ⑤
  • 김탁
  • 승인 2017.11.16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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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김탁 우리역사바로알기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김탁 우리역사바로알기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한국상고사·민족사상 연구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대 정책대학원 고위정책과정 수료 Simple People Inc 대표

지난번 연재에서 22세 색불루 단군의 은나라 정벌기사에서 “을묘20년(BC1260), 이때에 남국(구이의 하나)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쫒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골奄瀆忽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岐(오늘날 섬서성 일대)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임금(황皇)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 이남의 땅까지 미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엄독골은 임승국 교수의 주석에 따르면 “한서지리지에 보이는 위만조선의 험독險瀆현을 말하는 것이다. 즉 요동군엔 현이 18개가 있다. 그 가운데 험독현의 주석에서 응소라는 사람은 ‘험독은 조선왕 위만의 서울이다’라고 하였다”고 했는데, 엄독골은 험독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한무제에 의해서 멸망당한 위만조선의 서울인 험독현이 곧 엄독골이라는 뜻입니다. 위만조선의 도읍지는 왕검성 혹은 왕험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 하북성 난하 하구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에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岐(오늘날 섬서성 일대)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임금(황皇)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 이남의 땅까지 미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국은 산서성 장치현의 서남에 있는 여주, 즉 여국으로 요임금의 후손들이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여국에 대한 기록은 배달국 시대에 제후국으로서 웅녀군이 다스리는 여국이 있었는데 단군왕검은 여국의 비왕으로 있다가 왕이 전사함으로 여국을 이어받고 드디어 단군조선을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국에 대한 기록은 <서전>에서도 보이는데 동방 배달계의 족칭의 하나로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국은 빈, 기 지방에 세워진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여국을 의미한다고 봐야겠지요.

고죽군孤竹君은 고죽국왕을 뜻하는데 우리 역사에 고죽이라는 명칭이 자주 등장하므로 고죽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고죽孤竹은 글자 뜻대로 보면 ‘외로운 대나무’라는 뜻이 되는데 고孤는 우리말 홀로, 독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말 ‘홀’을 한자로 고孤로 표기한 것입니다. ‘홀’은 ‘하라’의 줄임말로 해, 광명을 뜻하는 우리 고어입니다.

죽竹은 대나무의 대 인데 대는 ‘다라, 다’로써 나라, 땅이라는 고어입니다. 다라는 한자로 달達이라고도 표기하는데 아사달에서 보듯이 ‘땅’이라는 뜻입니다. 즉 고죽은 우리말 ‘하라다라 =홀달’을 한자를 빌려서 표기한 것으로 광명의 땅, 빛나는 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양숭배 배달민족이 사는 땅이라는 뜻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상고사에 나오는 한자로 표기된 지명들은 이처럼 음차를 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 뜻을 제대로 새겨보아야 그 지명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죽국은 고구려의 발원지로 보이는 구려와 같은 곳으로 삼국유사에도 “고구려는 본시 고죽국이다(高句麗 本孤竹國)”라고 하고 있습니다. 백이 숙제의 고사로 더 잘 알려진 고죽국은 은나라 제후국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고죽과 산융, 영지는 동북방의 고조선계 제후국들로서 끊임없이 주왕조의 북방 제후국 침공하고 위협하였습니다. 이에 견디다 못한 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니 제나라 환공이 주왕조 제후국 연합군을 일으켜서 고죽, 산융, 영지 등 고조선의 제후국들을 토멸한 것으로 <관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나라 영역

23세 단군 아흘 갑신원년(BC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령하여 낙랑골樂浪忽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갈손을 보내 람藍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 부셨다.”

고불가는 낙랑골을 통치하고 구이의 하나인 람국藍國 왕과 더불어 남정군을 편성해서 은나라를 정벌하고 여섯 읍을 설치했다는 내용인데 우리 역사에 너무나도 자주 등장하는 ‘낙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짚고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낙랑이라면 흔히 북한 평양이나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떠 올리기 십상이지만 대명일통지에 따르면 낙랑은 다름 아닌 중국의 수도 북평을 말합니다.

<대명일통지>에 명나라 때에 영평부를 설명하는 기사에 “(낙랑군의) 군郡 명은 고죽군의 옛 이름이요 북평군은 진나라 때 이름이며 노룡군은 위나라 때 이름이며 북연 때에는 평주와 낙랑군으로 나누어 부르더니 북위 때에는 낙랑의 이름을 바꿔 북평군이라고 했다(郡名 孤竹爲古名 北平爲秦名 盧龍爲魏名 北燕平州及 樂浪郡 北魏改樂浪爲北平郡)” 하였으니 명나라 때는 북평을 영평부永平府라고 했는데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지명이 변천되어 왔습니다. 즉 고죽=북평=노룡=평주=낙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23세 단군 아흘 을유2년(BC1236)
“람국의 임금 금달今達이 청구靑邱의 임금, 구려句麗의 임금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고 몽고리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蒲古씨를 엄淹으로 영고寧古씨를 서徐땅에 방고邦古씨를 회淮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단군조선의 4개 제후국인 람국, 청구, 구려, 몽고리가 병력을 합세하여 은나라 깊이 쳐들어가서 엄국, 서극, 회국이라는 단군조선계 제후국을 설치했다는 기사입니다. 이 때에 청주 땅에 설치한 엄국은 후일에 주나라 성왕에게 반기를 든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旦이 아들 백금으로 하여금 노나라를 세웠던 곳이고, 포고 씨는 산동성 박흥현의 동쪽에 있던 나라입니다.

서徐는 양자강 북쪽 안휘성 사현泗縣의 북쪽 서주에 세워진 나라로 그 후에 계속 발전하여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되어 200여 년간 주나라와 천하를 양분할 정도의 막강한 세력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회대지방은 산동성의 대산(태산)과 회수지역을 말하는데 남후는 이 지방에 해모국解矛國을 설치하여 570년간 존속하다가 제나라 환공 때에 토멸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엄, 서, 회국은 주나라를 거쳐서 춘추전국시대까지도 명맥이 존속하다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봉건제를 타파하고 군현제를 실시함에 따라 일반 민호로 전락되었습니다. 진시황이 이들 동방계 귀족세력을 말살하기 위하여 만리장성과 여산능 조성에 동원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한반도로 피난을 오게 되었으며 이들이 마한왕의 통제 하에 변한(가야국 전신), 진한(신라 전신)세력을 이루게 된 것은 우리 역사시간에 배운바 있습니다.

특히 남후의 남방진출에 대해서는 후한서 동이전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중정왕 때에 이르러 남후가 난을 일으키니 무을이 쇠패하매 동이의 침탈이 더욱 세를 얻게 되고 회淮, 대垈지방으로 옮겨 살게 되고 점차 중토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至於仲丁 藍候作寇 武乙衰弊. 東夷侵盛 遂分遷淮垈. 漸居中土).”

은허유적지

25세 단군 솔나 정해37년(BC1114)
“기자 서화西華에 옮겨가 살면서 인사하는 일도 사절 하였다(箕子移居西華謝絶人事).”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기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데 기자가 서화에 와서 살았고 단군조선과 인사가 없었다는 내용입니다. 기자는 은나라의 마지막 주왕의 숙부로서 은나라가 망하자 주나라의 지배를 피해서 일족을 이끌고 조선으로 피신해 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지나족 역사가들은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하고 조선을 교화시켰다고 하는 망발을 저질러 왔습니다.

<대청일통지>에 따르면 “서화는 옛 기땅이다. 개봉부서쪽 90리에 있다. 처음 기자가 송나라 기땅에서 살았기때문에 기자라고 한 것이다(西華 故箕地 在開封府西九十里 初聖師食宋箕故 稱箕子 今邑中箕子臺)”라고 했고
<수경주水經注>에는 “두예가 말하기를 양梁나라 몽현蒙縣의 북쪽에 박벌성이 있는데 성안에 은나라 탕 임금의 무덤이 있고 그 서쪽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杜預曰 梁國蒙縣北 有薄伐城 城內有成湯塚 基西有箕子塚)”라고 했다.

하남성 서화지방은 남북조시대에 양梁나라 이었고 양나라 몽현이나 서화가 같은 곳이니 기자는 하남성 서화에 거서 살다가 죽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록이 이러할진데 기자가 언제 북한 평양에 와서 살았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겠는가?

지금까지 <환단고기>, <단군세기> 기록을 중심으로 단군조선과 은나라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은나라는 배달 동이계인 상족에 의해서 세워졌으며 600여 년 지속기간 단군조선의 영향권 내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은나라는 그 도읍지를 박(亳)에서 시작해서 상(相), 형(邢), 엄(奄), 은(殷)등 하남성, 하북성, 산동성 일대로 옮겨 다녔는데 단군조선의 정벌을 피해서 옮겨 다닌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은나라 문명을 대표하는 갑골문이 출토된 하남성 안양시인 은허 유적지로 수도를 옮긴 것은 19대 반경왕이었고 30대 주왕에 이르러 멸망할 때까지는 단대공정 연대기준으로 대략 268년(BC1314- BC1046)으로서 이 시기에 은나라 문명이 극성기를 이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은나라의 중흥을 이룩한 22대 무정왕은 그의 형인 반경이 은으로 수도를 옮기고 난 후에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은나라 전반기 300여 년간은 단군조선의 남방진출에 밀려서 쫓겨 다니다가 반경왕 이후에 마지막으로 옮긴 은에서 은 문명을 꽃피우게 된 것입니다.

다음 연재는 단군조선과 주나라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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