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미망의 시대를 향해 열린 여성의 실존과 자각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미망의 시대를 향해 열린 여성의 실존과 자각
  • 이규식
  • 승인 2017.11.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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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 호연재 시비

미망의 시대를 향해 열린 여성의 실존과 자각

月沈千嶂靜
川影數星澄
竹葉風煙拂
梅花雨露凝
生涯三尺劍
心事一懸燈
惆悵年光暮
衰毛歲又增     
     
달빛 잠기어 온 산이 고요한데
샘에 비낀 별빛 밝은 밤
안개바람 댓잎에 스치고
비 이슬 매화에 엉긴다
삶이란 석자의 시린 칼인데
마음은 한 점 등불이어라
서러워라 한 해는 또 저물거늘
흰머리에 나이만 더하는구나

- 김호연재, 야음(夜吟), 전부 (이숙희 역)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김 호연재(1681-1722). 흔히 호연재 김씨로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시대 여성 이름의 확장성이 미흡한 탓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음을 감안하더라도 그냥 김씨...라고 호칭하는 것은 이 걸출한 문인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여 김 호연재로 널리 알려졌으면 싶다. 허난설헌을 난설헌 허씨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것과 같은 연유에서다.

조선시대 봉건사회에서 뛰어난 문재와 지성, 비판력을 겸비한 여성이 주변 환경의 질곡과 가족사의 어려움을 딛고 자신만의 개성과 비전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던지는 날카롭고도 섬세한 메시지를 김 호연재가 남긴 여러 운문과 산문에서 읽는다. 한양에서 태어나 살았다면, 그만한 명문가 출생에 시댁 역시 걸출한 집안이라면 문명이 더 널리 알려지고 더 극진한 추앙을 받았을 것이다.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여 당시만 해도 오지였던 지금의 대전 송촌동으로 시집와서 살았던 그리 길지 않은 세월 김 호연재가 남긴 여러 한문 시가와 자경편(自警編)같은 교훈서는 삼백여년 시간을 거슬러 올라 여전히 생명력을 얻는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자결한 김상용 선생이 고조부이며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증손부라는 가문의 내력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봉건인습과 폐쇄적인 환경의 조선 양반사회에서 여성을 향한 질곡과 부당한 억압에 대하여 분연히 여성의 실존적 자각을 토로한 깨어난 의식과 청량한 정서 그리고 앞을 내다보는 혜안은 그 후 집안 후손들이 정성들여 ‘호연재 유고’로 묶어 전승해오는 여러 작품 행간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고 살기 어려웠다. 이런 익명성 속에서도 자아와 주변, 삶과 사회를 내다보고 고뇌하며 노래한 분들이 있었을텐데 김 호연재는 그 중심에 있다. 온갖 생각이 스쳐가는 깊은 밤, 명민한 감성은 자아와 환경을 씨줄과 날줄 삼아 자유자재한 한문실력으로 섬세하면서도 유장하게 펼쳐진다. 시댁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붕우(朋友)로 규정하여 남성중심의 종속개념을 탈피, 자아중심의 평등질서로 이해하겠다는 김 호연재의 열린 의식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호연재(浩然齋)라는 개방적이고 스케일 큰 표현을 아호로 삼은데서도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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