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광장] 오리의 기억, 풍금이 있던 자리
[청년광장] 오리의 기억, 풍금이 있던 자리
  • 이수현
  • 승인 2017.11.2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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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굿모닝충청 이수현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신경숙의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 서두에는 ‘오리는 알에서 갓 깨어난 12시간~17시간이 가장 민감하다. 오리는 이 시기에 본 것을 평생 잊지 않는다’고 적혀있고, 주인공을 비롯한 소설의 분위기를 끝까지 관통한다.

사랑하는 유부남과 해외로 도망치기 전, 집에 내려와 그 여자를 기억해 내고 그녀는 자신의 ‘남녀 간의 어지러운 정’을 알아차린다. 점촌 아주머니 부고를 듣고 또 한 번 알아차리고, 에어로빅을 배우던 중년 부인을 기억해 낸다.

과거의 기억들이 지나가는 심한 통증 속에서, 그 여자가 아버지를 떠난 것처럼 남자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녀가 남자를 떠나기로 한 것은, 점촌아주머니, 자신의 어머니, 그 중년 부인의 불행의 원인이 그 여자 혹은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능에서 깨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보였다.

본능을 컨트롤하는 전두엽을 가진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따라서 통이 법적인 죄든 아니든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리다’라는 어쭙잖은 변명에 분개할 일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남녀 간의 어지러운 정’이 어느 날 훅 들어올 수 있다. 조용하던 호수에 커다란 바윗덩이가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는 데 어쩌랴! 아버지를 죽일 놈이라고 증오하라는 게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내와 네 명의 자녀가 얽혀 사는 집 안으로 자기 정에 못 이겨 그 여자를 들어오게 하고도 당당했던 아버지, 그 여자가 떠났다고 술독에 빠져 주변을 어지럽게 하고도 당당했던 아버지를 분별하지 못했다. 자신의 또 다른 능력을 깨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가 떠난 후,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 속에 있을 수 있었던 남자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결국, 그녀의 본능 안에 각인된 그 여자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아마, 다시 아버지-남자가 나타나면 그녀는 그 여자가 되어 버릴 것이다.

본능 속에 각인된 기억은 이렇게 집요하다. 특히, 아주 어릴 때 받아들인 기억은 참 잔인하다. 분별의 뇌를 깨우지 못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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