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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③ 대야성 승리의 불꽃은 18년 만에 백제를 태워버렸다
    • 이재준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7.12.07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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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이다. 따라서 백제 패망의 모든 원인이 의자왕에게 모아질 수밖에 없다. 사료에 기록된 내용들은 의자왕이 황음무도하고 무능한 왕으로 백제를 패망의 길로 이끌어 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백제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괴담이나 재이(災異)현상이 고구려에 비해 너무 많다. 그리고 삼천궁녀 이야기가 백제 의자왕의 대명사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기록된 역사는 백제가 남긴 역사라고 보기 어려우며 철저하게 승자들에 의해서 각색되었다. 의자왕의 즉위와 대외정책, 멸망징조의 진실 등에 대해 알아보자. [편집자 주]

     

    이재준 예비역 육군대령 영남대 한국군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국가 간의 전쟁형태나 종류는 다양하여 단순하게 몇 가지로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의 전쟁은 결과를 놓고 볼 때 영토전쟁과 멸망전쟁으로 명명할 수 있다.

    백제 의자왕은 641년 즉위한 이래 20년 동안 9차례나 신라를 침공하여 모두 81개의 성을 빼앗았다. 가장 큰 성과는 642년 7월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항복시킨 것이다. 그리고 8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합천의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킨 것 또한 혁혁한 승리였다.

    이와 같이 의자왕은 신라와의 영토전쟁에서 역대 왕들과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는 승리를 거두며 신라를 압박하였다. 하지만 신라는 영토전쟁이 아닌 백제 멸망전쟁을 준비하고 660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침공하였다.

    백제 멸망전쟁의 발단은 대야성 함락이었다.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항복한 성주 품석(品釋)과 그 부인을 죽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목을 가져다 백제궁궐 계단 아래 묻었다. 554년 관산성에서 살해당한 성왕의 죽음에 대한 원한풀이였던 것이다. 결국 대야성 전투결과는 백제 멸망전쟁의 근원이 되었다. 대야성 성주 품석의 처는 김춘추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딸을 잃은 김춘추는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18년 만에 그 꿈을 실현하게 된다. 서로 간에 얽힌 원한으로 시작된 전쟁이 영토전쟁에서 멸망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그 과정을 살펴보고 오늘날 남북관계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보자.

    부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된 백제궁궐. 백제 후손들이 만들었다는 일본 나라의 동대사와 형태가 유사하다.

    대야성에서의 화려한 승리
    의자왕은 642년 8월 장군 윤충과 군사 1만을 보내 경남 합천에 있는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백제군에는 신라에서 도망해온 모척(毛尺)이 있었다. 모척은 대야성에 있던 검일(黔日)과 공모하여 백제의 군사를 성으로 들여보내는데 성공한다.

    검일이 대야성 내에 있는 식량창고 위치를 알려주니 백제 군사들이 불을 질렀다. 대야성의 식량창고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결국 성내에 먹을 것이 떨어지고 1만 백제군이 쇄도해 들어가니 성주 품석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였다.

    윤충은 그들을 모조리 죽여 수도로 보내고 남녀 1000명을 사로잡아서 나라 서쪽 주·현들에 흩어져 살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머물게 하여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이상은 백제본기의 내용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열전에는 죽죽(竹竹)이 대야성에서 끝까지 버티다가 죽었고, 성주 품석은 처자를 먼저 죽이고 자기도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어느 것이 맞는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김춘추의 딸이 백제 장군에게 죽었다고 자료를 남기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백제본기의 내용이 사실로 보인다.

    고대에도 항복한 적장은 죽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윤충은 항복한 대야성 성주 품석과 처자의 목을 베어 수도(부여)로 보냈다. 품석과 그의 부인이 당시 신라의 최고 권력자 김춘추의 사위이자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수도로 보내온 품석과 김춘추의 딸 유해를 궁궐 계단 밑에 묻었다. 그리고 지나다니는 모든 백제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하였다. 이는 아마도 신라에 대한 백제의 씻을 수 없는 원한 때문이었다. 결국 이들 유해는 6년 뒤인 진덕왕 2년(648) 김유신이 대야성을 탈환하고 포로로 잡은 백제장군 8명과 교환함으로써 신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외견상으로 642년 백제가 첩자를 이용하여 식량창고를 불사르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성주의 항복을 받아낸 것은 혁혁한 승리였다. 더구나 항복한 신라 김춘추의 딸과 그 사위의 목을 베어 백제궁궐 계단 밑에 묻고 밟고 다님으로써 성왕의 죽음에 대한 원한을 어느 정도 상쇄시킬 정도로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이 공로로 윤충은 왕으로부터 말 20필과 곡식 1000석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대야성에 피워 올린 승리의 불꽃은 18년 만에 백제의 멸망을 자초한 화려한 승리일 뿐이었다.
     

    1999년 1차 연평해전. 오른쪽 680호는 북한 구축함이다.

    18년 만에 이룬 백제병탄의 꿈
    대야성이 함락되고 성주인 사위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춘추는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서 하루 온종일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사람과 물건이 앞을 지나가도 살펴볼 줄을 몰랐다. 그리고 얼마 뒤에 말하기를 “어허! 대장부가 아무런들 백제 하나 삼키지 못하랴!” 하고는 즉시 왕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제가 사명을 받들고 고구려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겠나이다” 하였다. 왕의 허락을 받은 김춘추가 고구려로 갔다.

    김춘추가 하루 종일 넋 나간 사람처럼 있었다는 기록은 그의 딸 사랑 정도가 매우 컸음을  말한다. 사실 김춘추에게는 딸이 셋 있었다. 대야성에 죽은 고타소는 첫째 딸이다. 둘째 딸은 요석공주로, 원효와 연애하여 설총을 낳는다. 셋째 딸은 지소인데, 나이가 60인 외삼촌 김유신에게 시집을 간다. 

    김춘추에게는 첫째 딸이 더 사랑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종일 기둥에 기대여 대야성에서 죽은 고타소를 생각하며 그 원한을 어떻게 갚아줄까 고민하였다. 비록 김유신이 648년 백제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다시 빼앗았지만 대야성의 탈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켜 딸과 사위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했다.

    결국 김춘추가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동안 국경지대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영토전쟁이 아니었다. 백제의 왕도를 접수하여 완전히 병합하겠다는 멸망전쟁이었다. 하지만 당시 신라로서는 그만한 힘이 안 되었다. 백제는 크고 강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군사가 필요하였다. 김춘추는 642년 곧바로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7년 왜(倭)에도 건너갔으나 군사를 요청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왜의 정세파악을 위해 건너갔던 것으로 정도로 추정된다.

    648년에 당나라 태종에게 가서 군사를 요청하여 드디어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당 태종의 죽음으로 무산되었다. 이후 650년에도 아들 김법민을 당에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으며, 김춘추가 무열왕에 즉위한 뒤 659년 또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18년 만에 그 꿈을 이루게 된다.

    경남 합천군 대야성. 동쪽에 신라 충신 죽죽 유적비가 있고 앞에는 황강이 흐른다.

    대야성의 지리적 위치와 중요성
    대야성은 경남 합천에 있는 황강 주변의 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경주로부터는 직선거리로 100km 정도 떨어져 있는 신라의 서쪽 국경지대였다.

    대야성의 성주 김품석은 신라의 진골출신이었다. 진골인 품석이 성주로 지킬 만큼 대야성은 중요했다. 하지만 경주와의 사이에 낙동강과 황강이 있어 유사시 지원을 받기에는 제한되는 면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반면 충남 부여로부터는 직선거리로 약 140km 떨어져 있다. 부여에서 추풍령로를 따라서 합천으로 기동하려면 상당한 거리를 행군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백제는 합천 대야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1만여 명의 군사를 파견하였다. 합천 대야성으로부터 경주까지는 추풍령과 같이 높은 산 등의 장애물 없어 신라 수도까지 접근이 용이한 지역이다.

    또한 황강과 낙동강을 연하여 신라와 국경경계를 획정 지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성은 강변을 이용해 해발 90m의 정상에 흙과 돌로 축성되어 있다. 신라는 백제가 빼앗은 대야성을 6년만인 648년 다시 빼앗았다.

    통일신라 말기에 견훤(甄萱)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여러 차례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뒤에 후고구려가 점령하였다가 다시 후백제가 점령하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곳이다. 이후 936년에 최종적으로 고려가 차지하게 되는 등 전례(戰例)로 보아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음에 틀림없다.

    지금 안보상 중요한 지역은
    대야성이 7세기 당시 백제와 신라에게 지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면, 오늘날 안보상 중요한 지역으로 어떤 지역을 꼽을 수 있을까? 안보상 중요한 지역이라고 하면 어패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하지 않은 지역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례(戰例)로 볼 때 백령도를 포함하는 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또는 소연평도) 등 서해 5도가 아닐까 한다.

    서해상에는 대한민국 서해 5도와 북한의 황해도 사이에 북방한계선(NLL)을 설정되어 있다. 북방한계선(北方限界線. 영어로 Northern Limit Line의 약자 NLL)은 대한민국과 북한사이에 설정된 사실상의 남북 해상 군사분계선이다. 그런데 이 해상 경계선이 1973년 서해사태와 1999년 제1차 연평해전 이후 군사적인 분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서해사태는 1973년 10월부터 12월 사이, 10여 차례에 걸쳐 40여 척의 북한 함정이 집중적으로 NLL을 침범한 사건이다. 고속전투함 위주의 전력을 갖춘 북한이 연평도, 대청도 등 연안까지 거침없이 침범하고, 인천 백령도와 연평도를 오가는 우리 여객선을 에워싸는 초유의 사태를 발생시켰다. 당시 우리는 무장을 갖춘 소형 고속정이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이후 제1차 연평해전은 1999년 6월 15일 북한함정이 서해 연평도 인근 NLL을 넘어 대한민국영해를 침범해서 발생한 해상전투이다. 제1차 연평해전에서는 우리 함정을 공격하는 북한 함정 10척을 대한민국 해군이 14분 만에 격퇴시켰다.

    이 교전에서 북한의 어뢰정 1척이 침몰하였고, 420t급 경비정 1척이 대파되었으며, 나머지 경비정 4척도 선체가 파손된 채 퇴각하였다. 북한 측의 인명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20여 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측 피해는 없었다.

    2차 연평해전은 1차 해전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2002년 6월 29일 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이 우리 고속정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해오면서 시작되었다. 피격을 받은 우리 고속정들은 즉각 집중 대응사격을 개시하였다.

    우리 측 승조원 27명 중 4명이 전사하고 1명이 실종되었으며, 19명이 부상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고, 피격된 고속정 참수리호는 예인 중 침몰되었다. 북한 경비정도 30여 명의 인명피해를 입고 외부에 장착된 각종 화기가 무력화되어 침몰 직전에 다른 경비정에 의해 예인되어 북상하였다.

    서해 5도는 왼쪽부터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소연평도(무인도인 우도를 포함하기도 한다) 등이다.

    3차 교전인 대청해전은 2009년 11월 10일 11시경 북한 경비정 한 척이 NLL을 침범하여 대청도 동쪽 11.3 km 지점까지 남하하자 우리 측이 5차례 경고방송을 했고, 이에 응하지 않자 대한민국 해군이 경고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북한 경비정이 조준사격하면서 교전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우리 군은 피해가 없었고 북한 경비정은 반파되어 다른 함선에 예인되어 북상하였다.

    2010년 3월 26일 21시경에는 백령도 서남방 2.5Km 해상에서 경계 임무수행 중이던 해군 제2함대 소속 천안함이 북한 잠수함의 기습 어뢰공격으로 폭침되어,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2010년 11월 23일에는 우리 측 연평도 해병의 해상 포사격 훈련을 빌미로 북한이 연평도에 170여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북한의 포격에 대피했던 해병대는 13분 후 총 80여 발의 대응포격을 실시하였다.

    북한의 포격으로 해병대원 전사 2명, 중경상 16명, 민간인 사망 2명, 중경상 3명의 인명 피해와 각종 시설 및 가옥 파괴로 재산피해를 입었다. 북한은 1명이 죽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정확한 피해현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대야성은 백제와 신라가 뺏고 빼앗기고,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수차례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오늘날 서해 5도에서의 남북한 교전과 다를 바 없다. 즉 7세기에 전략적 요충지를 놓고 결전을 벌였듯이 오늘날 빈번한 남북한 교전지역은 이미 식별된 전략적 요충지 서해 5도이다. 식별된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충분한 대비태세가 요구되는 역사적 교훈이다. 

    불장난은 스스로를 태울 수 있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완료한 다음 수순은 무엇일까? 핵과 미사일에 인질이 된 대한민국을 상대로 실질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도발을 감행해 올 것이다. 그 도발을 예상하건대 지금까지 문제가 되어왔던 서해 5도에 대한 기습점령이 될 수 있다. 더구나 북한이 서북도서 점령훈련을 실시해온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서해 5도는 수산자원이 풍부하고 우리 국민 1만 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특히 백령도는 최북단 도서로써 평양까지 단거리 접근로의 기점이다. 백령도를 포함하는 5개 도서는 북한의 서해진출을 통제하며 인천 앞바다의 공간을 확보하여 인천과 수도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다.

    반면 북한 입장에서도 서해 5도를 확보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에게 심리적 타격을 줄 수 있으며 자신들의 해상전력을 서해상에 전개하기에 유리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북한이 도서 점령훈련을 실시하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서해 5도에 대한 철저한 군사적 대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만약 북한이 서해 5도에서 승리의 불꽃을 피운다면, 백제가 대야성에 올렸던 승리의 불꽃이 백제를 멸망시킨 원인이 되었던 것처럼, 스스로를 태울 수 있다는 교훈을 주지시켜야 한다.

    아울러 어떠한 도발에도 서해 5도를 지킬 수 있는 대비태세를 유지함은 물론 어떠한 형태의 기습점령도 용납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북한 측에 각인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재준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55q10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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