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눈, 산수유, 성탄 그리고 아버지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눈, 산수유, 성탄 그리고 아버지
  • 이규식
  • 승인 2017.12.09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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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산수유, 성탄 그리고 아버지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히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聖誕祭 가까운 都市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설어운 설흔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김종길, 성탄제(聖誕祭)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 산수유의 추억
제목은 ‘성탄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기독교적 메시지나 축제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를 구원한 예수의 사랑과 어린 시절 시인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희생적인 사랑이 겹쳐져서 생명과 사랑의 온기를 느끼게 하는 성탄제다. 유년 시절의 성탄제는 흔히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로 기억되지만 시인에게는 아버지가 눈 속에서 구해오신 붉은 산수유의 진한 사랑으로 남아있다. 어두운 방안 바알간 화로 옆, 크게 아파 괴로웠던 어린 시절의 시인은 드디어 해열제라는 산수유를 구해 돌아온 아버지를 맞이한다. 엄동설한에 산수유, 극진한 부성애가 마침내 찾아온 산수유는 우선 눈길을 하염없이 돌아다녔을 아버지 옷자락의 서느런 감각체험으로 지금껏 남아있다. 어린 시절 앓던 열병이 산수유로 치유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열병이 이제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으로 바뀌었다. 눈길을 달려와 차갑게 얼어버린 아버지 두루마기 자락에서 서늘한 만큼이나 뜨거운 외강내유의 자식 사랑이 배어나온다.

 

#. 근엄하고 따뜻한 아버지 사랑

시대가 바뀌면서 자식 사랑의 모습도 변한다. 한 두 명의 자식을 향하여 부모들이 쏟는 과도한 애정과 보살핌, 더러 어긋난 사랑의 집착 한 켠에는 싸늘한 냉정과 무관심의 어두운 그림자도 드리워 있다. 올 봄 91세로 세상을 떠난 김종길 시인이 어린 시절 받은 부모의 사랑은 ‘성탄제’에서 서술된 꼭 그대로의 애정이 아니었을까.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근엄한 듯 보여도 더없이 뜨겁고 에틋한 부모의 정을 이 한 편의 시에서 되새겨본다. 서른 살이 된 시인은 비로소 아버지의 크고 넓은 사랑을 다시금 깨닫는다. 모두 변해 버리고 오로지 흰 눈만 그 시절이나 다름없이 하얗게 내리는 성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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