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④ 외교의 달인 김춘추는 백제전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했다
[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④ 외교의 달인 김춘추는 백제전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했다
  • 이재준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7.12.1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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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한반도 삼국에 있어 백제는 군사적으로 결코 허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600년 무왕 즉위 이래 의자왕 19년(659)까지, 백제는 신라를 21회 침공하여 12회에 걸쳐 승리하였으며, 81개 성을 빼앗았다. 이러한 수치는 백제의 군사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막강한 전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막강한 전력을 가진 백제가 642년 신라의 대야성 함락시켰다. 그리고 항복한 대야성 성주 품석과 처자의 목을 베어 백제궁궐 계단 밑에 묻어버렸다. 김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백제를 반드시 멸망시키겠다고 결심하였다. 대야성에서 죽은 성주 품석과 부인은 김춘추의 사위이자 딸이었기 때문이다.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결심하였지만 신라로서는 백제를 침공하려면 추가적인 군사력이 필요했다. 당시 백제의 군사력이 막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춘추는 인접 고구려, 왜, 당나라 등을 방문하며 군사지원을 요청해야 했다.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이 얼마나 집요하고 끈질기었는지 살펴보자. [편집자 주]

 

충남 태안 별주부 마을 토끼와 거북이 석조물

간을 빼놓고 적국에 간 김춘추

이재준 예비역 육군대령 영남대 한국군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고구려는 642년 10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웠다. 643년 백제는 과거 고구려와 적대감정을 버리고 화친을 맺어 신라의 당나라 통로인 당항성(党項城)을 빼앗고자하였다. 즉 고구려는 신라의 적대국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김춘추는 대야성의 원한을 갚고자 적대국 고구려로 군사를 요청하러 갔다. 다음은 그 일화내용이다.

선덕왕 11년(642) 김춘추가 고구려에 가서 백제를 치기위한 군사를 요청했다. 고구려 보장왕이 말하였다.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 땅이다. 네가 만일 죽령 서북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낼 수 있다.” 이에 춘추가 대답했다. “남의 나라 외교관을 위협하여 땅 돌릴 것을 요구하니 나는 죽음을 각오할 뿐이요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춘추가 공손하지 않자 보장왕이 화가 나서 춘추를 별관에 가두었다. 당시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운 직후여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보장왕의 말은 연개소문의 의도였을 것이다.

고구려에서 위기에 처한 김춘추는 몰래 사람을 보내 본국의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이 김유신과 결사대 1만을 고구려로 급히 보냈다. 김유신이 한강을 건너 고구려 남쪽 변경으로 들어가니 고구려왕이 듣고 춘추를 돌려보냈다. 이상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용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전에는 내용이 다소 다르다.

고구려 보장왕이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니 만약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못 한다”고 하였다. 춘추가 대답하기를 “국가의 영토는 신하들의 마음대로 할 바가 아니니 제가 감히 명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니 보장왕이 춘추를 죽이려다 죽이지 못하고 가두었다.

이때 춘추가 고구려 왕이 총애하는 선도해(先道解)에게 푸른 베 300보를 몰래 주었다. 선도해가 술과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와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별주부전에 나오는 ‘거북이와 토끼의 간’이야기를 하였다. “동해 용왕의 딸 속병에 쓸 토끼 간이 필요하여 거북이가 토끼를 속여 바다 속 용궁으로 유인해 데려왔다. 거북이 등을 타고 용궁으로 간 토끼가 죽게 될 것을 을 눈치 채고 간과 염통을 바위에 널어놓고 왔다고 꾀를 내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토끼가 거북이 등을 타고 다시 뭍에 오르자 ‘어리석다 거북아 간 빼놓고 사는 놈이 있느냐’하며 도망하여 살아났다”고 한 별주부전 이야기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춘추가 꾀를 내어 왕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두 영은 본래 귀국의 지역이니 제가 귀국하여 우리 왕에게 이를 돌려보내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합시다”하니 고구려왕이 기뻐하며 풀어주었다. 춘추가 국경에 다다르자 전송하러 나온 자에게 “요전에 대왕에게 준 글은 죽음을 모면하려고 했을 뿐이었다”고 조소하며 무사히 돌아왔다. 김춘추의 외교술이 돋보이는 내용이다.

김춘추의 3국 군사요청 외교행보

왜국도 호감을 가진 김춘추
‘일본서기’에는 647년 김춘추가 왜국에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김춘추가 왜에 건너간 기록이 없다. 하지만 당시 왜는 친(親)백제 정권이었던 소아씨(蘇我氏)를 타도하고 개신정권(改新政權)이 들어섰다.

신라는 진덕왕 원년(647) 상대등(上大等) 이찬(伊湌) 비담(毗曇)의 난이 진압된 직후로 정권의 안정을 요하는 시기였다. 김춘추는 이찬(伊湌)으로 신라에서 권력의 최고정점에 있었다. 따라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결심한 김춘추의 왜국 방문은 사실로 보이며, 개신정권이 친(親) 신라 노선을 견지하도록 하고 백제를 공격할 때 중립을 유지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춘추를 질(質)로 삼았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도 있으나, 춘추는 용모가 준수하고 담소를 잘하였다는 긍정적인 기록으로 보아 당시 왜의 대외정책은 친 신라 정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왜는 친신라, 친당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백제와의 친연관계는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백제를 통한 대륙문물 수입과 오랜 우호적인 관계 그리고 642년 이래 왜국에 장기 체재한 의자왕의 아들 풍장 등 백제왕족들의 외교영향으로 추정된다.

한편 신라는 650년 당 연호를 사용하며, 651년에는 신라 사신이 당복(唐服)을 입고 왜국에 가게 된다. 이때 왜국에서는 사신의 복식에 불만을 품고 입경시키지 않고 축자(筑紫)에서 돌려보내는 사건이 발생한다.

‘신당서’에 654년 당 고종이 왜왕에게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군사를 내어 구원하라”는 새서(璽書)를 보낸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655년 신라의 30여 성이 함락될 때 ‘일본서기’에 신라에서 급찬 미무(彌武)가 왔다는 기록은 있으나 왜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하여 보면 김춘추가 왜국을 방문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 태종의 초상화(출처 : Daum 백과사전)

철저한 사대로 당 태종을 움직인 김춘추
신라는 진평왕 47년(625)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 조정에 출입할 수 없게 하고 또 자주 침범한다”고 하소연하였다. 선덕왕 11년(642)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로 가는 길을 끊으려고 한다”고 당 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보고하였다.

선덕왕 12년(643)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자주 침범하니 군사를 빌려 달라”고 당에 요청하게 된다. 이때 당 태종이 세 가지 계책을 말하였으나 신라사신이 답변을 못해 무산되었다.

이후 진덕왕 2년(648) 김춘추가 입당하여 태종에게 보고하였다. “백제가 포악하고도 교활하여 자주 침범을 하였으며, 지난해는 대부대의 군사로 수십 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입조할 길조차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사로써 흉악한 무리들을 잘라 없애지 아니한다면 우리 지방백성들은 전부 사로잡히게 되니 육로와 수로를 거쳐 조공할 일도 다시 바랄 수 없습니다”하였다. 또한 춘추는 “관리들의 복식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하였다. 그리고 “제가 자식 일곱이 있는데 황제 곁은 떠나지 않고 숙위하면서 모시도록 해 달라”고 하였다.

당 태종이 깊이 동감하고 군사를 내어줄 것을 승낙하였다. 비록 대국을 섬기겠다는 사대를 하였지만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김춘추의 외교적 수완이 돋보였다. 그러나 당 태종은 고구려를 여러 번 공격하다 실패를 거듭하여, 요동전쟁을 중지하라고 유언을 남기고 649년 4월 죽었다. 당 태종의 죽음으로 김춘추의 군사요청도 무산되었다.

경주 통일전 태종 무열왕(표준영정 12호)

기이한 당 고종, 백제침략 결정
태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였다. 신라는 진덕왕 4년(650)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이 입당하여 백제의 침공사실을 말하고 군사를 요청하였다. 백제도 그동안 교류가 없다가 5년 만인 651년 당 고종 즉위 축하 겸 조공을 위해 입당하였다. 하지만 당 고종은 백제사신에게 “법민이 말한 바가 사리에 맞다. 빼앗은 땅을 신라에게 돌려주라. 만약 거역하면 변방의 국가들에게 요수를 건너 쳐들어가게 할 것이니 후회 없도록 하여라”는 협박성 조서를 내려 보냈다.

654년 성골이었던 진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진골이었던 김춘추가 신라왕에 추대된다. 신라왕에 즉위한 김춘추 즉 무열왕은 659년 다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를 칠 군사를 요청하게 된다.

태종이 죽고 즉위한 당 고종은 특이한 인물이었다. 태종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657년부터 659년까지 4차례나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 고종의 기이한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태종의 후궁이었던 무미랑(武媚娘)을 비(妃)로 삼았다. 무미랑은 후에 고종의 황후가 되었다가 중국 최초의 여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된 인물이다.

고구려 공격을 계속하던 당 고종은 신라의 끈질길 청병요구에 660년 드디어 백제를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백제로 출병하게 된다. 아마도 당 입장에서는 연이은 고구려 공격이 성공하지 못하자 백제를 먼저 공략하고, 고구려를 위아래 양쪽에서 협공하는 방안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당 고종은 당태종의 유언도 지키지 않으며, 부왕의 후궁을 자신의 황후로 삼는 등 기이한 사람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기이한 지도자가 등장할 때 예의주시해야 하는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김춘추에게서 배우는 교훈
김춘추가 당에 간 것은 648년이었다. 춘추가 당에 가기 전 겨울 신라에서 감질허(邯帙許)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 태종은 감질허에게 “신라가 신하로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부르는가?”라고 물었다. 감질허의 당 파견은 당시 진골이면서 최고 관등인 이찬(伊湌) 김춘추가 당에 가기위한 선발대로 추정된다. 여하튼 춘추는 이 사실을 알고 당 태종에게 군사를 요청하기 위해 직접 당을 방문하였다.

당 태종을 알현한 춘추는 신라 관리들의 복식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하고 복장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일곱 중 하나를 황제 곁을 떠나지 않고 숙위하면서 모시겠다고 청하여 허락받았다. 당 태종은 김춘추의 요청대로 군사를 내어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 후 춘추가 돌아온 다음해 진덕왕 3년에 신라의 관리들은 중국의 복식과 의관을 착용하였다. 그리고 진덕왕 4년에는 처음으로 중국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상대등(上大等) 이찬 알천(閼川)의 조치로 보이지 않는다. 진덕왕의 이어 태종 무열왕에 즉위한 김춘추가 당 태종에게 약속한 사항으로 김춘추의 작품이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651년 신라의 사신이 당나라 복장을 하고 왜를 방문하였다. 이에 왜에서는 신라의 사신이 당 복장을 착용하였다고 불쾌히 생각하고 쫓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왜가 당의 권위를 내세운 신라의 동맹 참가요구를 거부했음을 시사한다. 즉 김춘추는 백제전을 위해 왜국에까지 손을 내밀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무열왕위 뒤를 이은 문무왕은 한반도에서 당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나당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무열왕 김춘추는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지원받기 위해 철저하게 당에게 사대를 하였다. 김춘추는 삼국통일 대업의 초석이 된 백제정벌을 위해 자존심을 버렸던 것이다.
오늘날은 국가 간의 교섭이나 외교에 있어 자국 내의 비판여론 등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각국이 이익을 추구하는 국제관계에서 실질적인 이득을 취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국가의 안보에 관한 경우에는 궁극적인 목적달성을 위해 일정부분은 버리는 지혜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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