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⑤나당연합군을 결성한 당군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⑤나당연합군을 결성한 당군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 이재준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7.12.1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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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당나라에게 백제정벌을 위한 군사를 지원해 줄 것을 4회나 요청하였다. 결국 당나라는 660년 백제정벌을 위한 군사를 출동시키게 되었다. 당군 13만 명이 바다를 건너와 신라군 5만 명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를 우리는 나당연합군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연합이라는 명칭에 어울리게 두 나라의 군대는 상호 협력하여 아주 대등하게 작전한 것으로 인식하여 왔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신라군이 공격 목표였던 백제의 수도 부여를 지나 경기도 이천까지 올라갔다 다시 내려온 사실 등에서 대등하게 작전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백제의 수도 남쪽에서 합류한 당나라의 소정방과 신라의 김유신이 서로 싸우려고도 했다. 나당연합군의 작전이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들을 분석하여 당군의 속내를 살펴보자. [편집자 주]

 

남천정으로 추정되는 이천 설봉산성(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23호)

당나라의 백제정벌 결정

이재준 예비역 육군대령 영남대 한국군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당나라는 618년 건국 이래 630년대 북방의 동돌궐과 서방의 토번(티벳트), 토욕혼 등을 격파하고 640년 고창국(중국 신강성 일대)을 멸망시킨다. 이어 동방으로 눈을 돌린 당은 고구려를 공략하고자 한다. 641년 당나라의 진대덕(陳大德)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면서 고구려의 지리를 정찰하여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당 태종은 수만 명으로 요동을 공격하고 고구려 전 병력이 요동을 구원하러 나온 틈을 타 수군(水軍)으로 평양을 치면 고구려를 빼앗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침공계획을 검토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642년도에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우자,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삼아 645년 약 10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요수를 건너 요동지역의 개모성(蓋牟城), 비사성(卑奢城), 요동성(遼東城), 백암성(白巖城) 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안시성(安市城)에서 크게 패하고 요수를 건너 겨울에 철수하려다 요동지역의 진흙수렁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후 당 태종은 647년에 2차례, 648년에 3차례 더 침공을 하였으며, 고구려가 피로해졌을 것으로 판단하여 이듬해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단번에 멸망시키려고 계획하였다. 하지만 649년에 당 태종이 요동전쟁을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어 고종이 즉위하였다.

당 고종은 태종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655년 2월과 5월 2차례, 658년, 659년에도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크게 이기지 못하였다. 중국을 통일한 당 입장에서는 고구려를 정벌하여 주변국을 모두 복속시키는 역대 최고왕조를 꿈꾸었으나 여의치 못하자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이즈음 신라는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받아 4번씩이나 당에게 백제를 공격할 군사를 요청하였다. 643년에 이어 648년에는 김춘추가 직접 당 태종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으나 태종의 죽음으로 무산되었다. 이후 650년에는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이 군사를 요청하였으며, 654년 무열왕에 즉위한 김춘추가 659년에 4번째 군사를 요청하는 사신을 당에 보냈다.

당 고종은 그동안의 고구려 공격이 여의치 않아 고민하던 중 신라의 백제정벌 군사요청을 승인하게 된다. 즉 백제를 먼저 정벌한 뒤에 고구려를 남북에서 협력하여 공격한다면 멸망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으로 660년 드디어 당나라와 신라군이 연합한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어 각각 백제로 출병하게 되었다.

신라군이 택한 북상로
660년 4월 당의 백제정벌 결정소식을 들은 신라군은 5월 26일 경주를 출발하게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신라 무열왕과 김유신 등은 백제의 수도를 지나쳐 남천정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까지 행군하였다. 사료에 기록된 양군의 행군일정을 보자.

무열왕이 이끄는 5만 신라군사는 660년 5월 26일 경주를 출발하여 6월 18일 경기도 이천 남천정에 도착하였다.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당군은 1,900척의 배를 타고 6월 18일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6월 21일 인천의 덕물도에 도착하였다. 무열왕은 병선 100척과 태자 법민을 덕물도에 보내 소정방을 맞이하였다. 소정방은 법민에게 “대왕의 군대는 육로로 가고 나는 수로로 가서 7월 10일 백제 남쪽에서 만나 의자의 도성을 깨뜨린다.”는 작전계획을 하달하였다.

경주로부터 경기도 이천까지 신라군이 사용한 경로를 검토해보자. 경주를 출발한 신라군은 영천을 거쳐 대구 팔공산 뒤편에 있는 군위(軍威)에 다다랐다. 군위는 당시 신라군의 위세가 대단했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군위로부터 경기도 이천까지 다다르는 고대의 길은 세 루트가 있었다. 그중 하나인 죽령로는 군위에서 의성을 지나 죽령-단양-충주를 거쳐 이천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죽령에서 김화까지 한반도 내륙을 관통하는 관도(官道)였다. 주변에 관방시설인 산성도 많이 있지만 원거리여서 택할 수 있는 루트가 아니다.

660년 신라군의 백제 공격 기동로(노란색)

두 번째 생각할 수 있는 길은 계립령로다. 군위에서 상주-계립령-조령-충주를 거쳐 이천까지는 단거리 접근로다. 그러나 문경-충주를 연결하는 지형이 험하고 중간에 거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산성이 적은 곳이어서 역시 택하기 곤란하다.

세 번째 추풍령로는 상주-화령-보은-진천-이천에 이르는 루트로써 백제와 국경지대로 많은 산성들이 위치해 있다. 더구나 추풍령로는 삼국 모두가 자주 사용한 통로였다. 신라군은 세 루트 중 국경지대에 배치되었을 병력도 동원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행군 도중에 어디에서든지 백제로 향할 수 있는 루트이다. 신라군은 추풍령로를 이용하여 경기도 이천까지 행군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군 북상의 미스테리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경주를 출발한 무열왕과 5만 신라군은 6월 18일 경기도 이천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3일간 행군한 셈이다. 왜 굳이 많은 병사들을 고생시키며 공격목표를 지나 경기도 이천까지 올라갔을까? 그 이유에 대해 ‘백제를 속이기 위해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당군의 식량을 지원하기 위해서’, ‘당군에게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서’, ‘지휘부만 다녀왔을 것’ 등이라고 한다.

먼저 백제를 속이기 위해서라는 견해를 검토해보자. 이는 백제를 기만시키기 위한 기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군이 북상할 경우 백제에게 배후를 공격당할 수가 있다. 이러한 위험을 감수해가며 이천까지 긴 행군으로 백제공격 전에 전투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백제를 속이기 위한 기만기동으로 볼 수가 없다.

다음은 고구려에 대한 견제기동이었다고 한다. 물론 단순한 기동만으로 견제효과를 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볼 때 실질적인 견제가 되려면 병력이 배치되어야 한다. 또한 고구려에 대한 견제기동이었다면 오히려 고구려군의 집결을 불러올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에 대한 견제기동도 아니었다.

당군에게 식량을 지원하기 위해서라며, 5만 군사가 모두 보급부대였다는 견해도 있다. 보급부대였다면 많은 식량을 경기도 이천까지 수송할 이유가 없다. 백제의 수도 부여근처 국경지대에 대기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다. 한편 태자 법민이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맞이할 때 인솔한 병선 100척을 군량선이라고도 한다. 13만 대군의 군량을 병선 100척으로 해결할 수가 없으며 법민이 인솔한 병선은 『삼국사기』에 전함(戰艦)으로 기록되어 있다. 보급부대였다는 논리는 타당하지가 않다.

다른 의견으로 신라군이 주력부대를 백제의 국경지대에 대기시키고 지휘부와 일부병력만 다녀왔다고 한다. 대부대가 행군하는 것과 지휘부만의 행군하는 것은 일일 행군거리에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일일 행군거리로 검증해보자. 고대군대의 일일 행군거리는 『춘추좌전』에 1사(舍)라고 하였다. 1사는 30리에 해당된다. 1902년 정해진 도량형규칙의 1리는 423.9m이다. 따라서 1사 30리는 12.7km가 된다.

신라군은 경주에서 경기도 이천까지 268km를 23일간 행군하여 하루 약 11.6km를 행군하였다. 다시 남하하여 백제의 수도 부여로 내려올 때에는 209km를 17일간 행군하여 하루에 12.2km를 행군하였다. 이러한 행군거리는 『춘추좌전』에서 밝힌 하루 행군거리에 타당한 거리이다. 만약에 지휘부만 다녀왔다면 더 빨리 다녀왔을 것이다. 즉 5만 신라군이 전부 경기도 이천까지 행군하였다가 다시 남하한 것이다. 고대군대의 일일 행군거리로 볼 때 지휘부만 다녀온 것이 아니다.

한편, 병력을 국경지대에 대기시키고 지휘부만 이천까지 기동하였다면 신라군은 지휘부가 없는 상태가 된다. 신라군이 국경지대에 지휘부 없이 대기하였다면 백제가 방치하고 구경만 했을 리 없다. 당연히 백제군이 신라군을 공격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5만 신라군이 백제의 수도 부여를 지나쳐 북상한 이유가 무엇일까? 왜 경기도 이천까지 기동하였을까?

당나라와 소정방의 저의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당연합군이라고 불러왔으며, 양국이 대등하게 작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소정방의 직책은 ‘신구·우이·마한·웅진도 등 14도 행군대총관’이다. 반면 무열왕의 직책은 ‘우이도 행군총관’이다. 즉 무열왕은 소정방의 예하지휘관으로써 소정방의 지시에 의하여 경기도 이천까지 행군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소정방은 덕물도에서 법민을 만날 때까지 무열왕에게 작전계획을 통지하지 않았다.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에 소정방을 칭송하는 ‘협영도무장(叶英圖武帳)’이란 글귀가 ‘뛰어난 계획을 장막에 감춰두고’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소정방은 작전계획을 무열왕에게 통보하지 않고 경기도 이천까지 행군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즉 신라군은 태자 법민이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만날 때까지 백제침공 작전계획을 몰랐던 것이다.

여하튼 경기도 이천까지 올라갔던 김유신은 다시 남하하여 7월 9일 황산벌에 도착할 때까지 약 40일간 행군하였다. 40일간의 긴 행군 탓으로 5만 신라군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에 4번이나 싸워 모두 패하였던 것이다. 결국 김유신은 계백과의 전투 때문에 7월 10일 소정방과 백제도성 남쪽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에 늦었다.

당시 늦은 이유를 물어 소정방이 신라장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의 목을 베려하자, 김유신이 칼을 빼며 당군과 먼저 싸우겠다고 하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소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의 기지로 무마되었다. 김유신 입장에서 계백에게 4번이나 패한 것도 분한데, 당군이 신라군을 경기도 이천까지 기동시킨 것에 화가 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소정방은 왜 신라군을 경기도 이천까지 기동시켰을까?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포로를 바치는 절차를 마치고 나자 당 고종이 소정방을 위로하며 물었다. “나간 김에 왜 신라를 치지 않았느냐.” 이에 소정방은 “신라는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신하가 나라를 충성으로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모시기를 부형(父兄) 섬기듯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新羅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如父兄 雖小不可謨也).”고 하였다. 즉 소정방은 애초부터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병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신라군의 힘을 빼기위하여 장거리 행군을 시켰던 것이다.

부여읍 정림사지 5층 석탑. 1층 ‘대당평백제국비명’에 협영도무장(叶英圖武帳)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동맹유지와 북한 핵에 대한 대비
당시 당군은 동아시아 최강자였다. 신라의 요청에 의해 출동하였지만 최고 강자였던 당은 자기들 나름대로 목적과 이익을 계산하고 행동하였다. 물론 신라는 당의 속내를 알고 수모를 참아가면서 결국 삼국통일의 대업을 일궈냈다고 추정된다.

개인이나 국가 간에도 대등하거나 순수한 협력이나 연합은 존재하기 어렵다. 모두가 각자의 손익을 계산하고 행동한다. 따라서 오늘날 자국의 안보를 위하여 각국이 합종연횡(合從連衡)하는 국제사회에서 동맹이나 연합을 이끌어내고 유지해 나가려면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상호 호혜적인 부분까지도 교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 북한의 핵무장과 미사일에 대한 우려 속에 안보와 관련하여 한미동맹에 관심이 많다. 물론 생존권이 걸린 안보문제에 있어 동맹을 비롯한 국제관계는 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은 국제화 시대이며 세계화 시대이다. 그리고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정치·군사·경제·문화·민간교류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노력이 정부의 역할을 뒷받침 한다. 즉 북한의 핵에 대한 대응 무기체계보다도 우선되는 것이 전 국민이 하나 된 통합된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임금이 아닌 나라를 섬긴 신하들
당시는 고대국가로 왕이 백성위에 군림하고 임금의 권한이 절대적인 시대였다. 그런데 소정방의 말에서 유심히 살펴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한다(新羅其君仁而愛民).”라고 한 부분이다. 즉 정치지도자들이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어질며, 국민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정신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또한 “신하들이 충성으로 나라를 섬긴다(其臣忠以事國).”고 한 부분이다. 신하들이 임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섬겼다는 것이다. 즉 당리당략이나 자신의 권력유지와 안위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국가를 먼저 생각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설령 이 문구가 사실이 아니고 역사가들이 미화하여 기록했다 하더라도 단어 하나하나에 철학이 있고 새겨볼 필요가 있는 교훈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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