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냄새의 기억을 좇아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냄새의 기억을 좇아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 이규식
  • 승인 2017.12.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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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찬수, Space and Memory-1508, acrylic on canvas, 130x130cm, 2015

냄새의 기억을 좇아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아 보라

어느 성소를 지나오며 품었던 곰팡내와

오랜 세월 거듭 부활하며 얻은 무덤 냄새를

달콤한 장미 향에서 누군가 마지막 숨에 머금었던 아직 따뜻한 미련까지

바람에게선 사라져 간 냄새도 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다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머리 내음

숲을 빠져나오다 문득 햇살에 잘려 나간 벤치의 추억

연붉은 노을 휩싸인 저녁

내 옆에 앉아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어깨를 안아 주던 바람이

망각의 강에 침몰해 있던 깨진 냄새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이게 무언지 알겠냐는 듯이

바람이 안고 다니던 멸망한 도시의 축축한 정원과

꽃잎처럼 수없이 박혀 있는,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전혀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가

그런 알지도 못하는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에도

도무지 이 바람이 전해 준 한 조각 내음의 발원지를 알 수 없다

먼 혹성에 천년 전 피었던 풀꽃 향이거나

다 잊은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살내거나

길을 나서는 바람의 뒷자락에선 말라붙은 낙엽 냄새가 흩날렸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이제 봄이 오기 전까지

저 바람은 빙벽 속에 자신만의 제국을 묻은 채 다시 죽을 것이다

- 윤의섭, ‘바람의 냄새’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첫 만남에서 상대방을 기억하는 기제로 이야기 내용은 7%에 불과하다고 한다. 38%가 목소리 그리고 외모 즉 시각적 요소는 55%를 차지한다는 통계가 있다. 이런 연구조사는 인간관계나 자기관리 영역에서 유용하게 활용될지는 모르지만 개인 차원에서 기억, 회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후각의 기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냄새의 힘은 강력하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어린 시절 홍차에 적셔먹던 마들렌 과자 냄새로 머나먼 기억 저편에 잠자고 있던 옛 추억을 온전히 소생시킨다. 인간의 오감 가운데 냄새의 위상은 어디에 있을까.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5감각이 서로 어우러지는 이른바 ‘공감각’의 경지를 꿈꾸었던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나 랭보 역시 후각에 비상한 관심과 열정을 기울여 그 미세한 감각이 자아내는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경외롭게 노래하였다.

윤의섭 시인은 두뇌와 지능의 기억력 보다는 몸, 감각의 기억력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냄새의 기억을 따라 삶과 죽음의 불가사의한 비밀, 인간존재와 살아가는 방식의 오묘함을 바람속에서 찾으려 대장정의 길에 나선다. 발닿는 구석구석, 곰팡내와 무덤냄새를 넘어 장미향에 이르기까지 바람이 포착하는 냄새의 미묘함과 방대한 영역은 그만 시간과 공간이 설정한 기억과 제한까지도 넘어선다. 나선 길에 삶의 발원지를 찾으려는 원대한 포부 바로 곁에는 말라붙은 낙엽냄새가 후각을 자극하고 있다. 한 손에 망원경, 다른 손에는 현미경을 들고 시인이 경험하는 냄새의 오디세이는 특히 개성적인 어휘 사용과 거친 듯 하면서도 정연한 시행으로 인상적이다. 후각의 상상력, 냄새에서 발원하여 소리, 색깔, 감촉 같은 다른 감각으로 확산되는 이런 경로가 바로 우리 삶의 족적, 인간이 이룩한 장하고도 졸렬한 공과의 노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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