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⑧백제군의 주력부대는 당진·예산방면으로 투입되었다.
[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⑧백제군의 주력부대는 당진·예산방면으로 투입되었다.
  • 이재준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8.01.0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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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이재준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이재준 예비역 육군대령 영남대 한국군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앞서 검토한 결과 백제는 660년 6월 11일경 나당연합군의 침공사실을 알고 전국에 동원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동원에 응한 인원이 약 6만 명 이상이었다. 660년 전쟁 사료에 기록된 백제군 사상자 수는 황산벌 5천명, 웅진강구 수천 명, 사비도성 방어 전투 1만 명 등이고, 당으로 압송된 인원은 1만 명이다.

이들을 종합해 보면 약 3만 명이 된다. 6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다면 3만 명이 남는다. 남는 인원은 어디에 있었을까?

3만 명은 당군이 면천의 백제수군창고를 공격하자 당진-예산 방면으로 투입하였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하였을 때 당군은 빠져나간 뒤였고,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항복하였다. 투입된 병력은 이 소식을 듣고 임존성에서 백제 부흥을 위하여 거병하였다.

이들이 임존성에서 거병하자 소정방은 군대를 보내어 임존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군은 임존성에서 소정방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소정방이 본국으로 철수하자 임존성의 백제군은 본격적인 백제 부흥전쟁을 이어갔던 것이다.

3만 명이면 동원된 병력의 절반으로 백제의 주력이나 다름없다. 백제는 왜 주력부대를 당진-예산방면으로 투입하였을까? 물론 당군 양공작전에 속아 투입되었다. 그러면 당군이 수행한 양공작전은 무엇이며 백제는 왜 양공작전에 속아 주력을 조기에 투입하는 과오를 범하였는지 알아보자.

당군이 도착한 덕물도
백제를 침공하는 당나라 소정방은 660년 6월 18일 중국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6월 21일 덕물도에 도착하였다. 6월 18일 경기도 이천 남천정에 도착한 신라의 무열왕은 병선 100척과 태자 김법민을 보내 소정방을 맞이하였다.

덕적도의 우리말 지명은 깊고 큰 바다에 위치한 섬이라는 뜻을 가진 ‘큰물섬’이라 전한다. 이것이 한자화 되어 덕물도(德勿島)가 되었다가 다시 덕적도(德積島)로 변화하였다.

덕적도를 비롯한 소야도(蘇爺島)·문갑도·선갑도·굴업도·선미도·백아도·울도 등을 포함하여 덕적군도라고 부르고 있다. 덕적도까지는 인천 연안여객 터미널에서 배로 1시간 4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덕적군도의 하나인 소야도는 당나라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정박했다 하여 소야도라 한다. 지금도 소야도 북악산 기슭에는 당나라 군사의 진지였다고 전하는 ‘담안’이라는 사적이 남아 있다.

덕적도는 아이러니 하게도 6.25한국전쟁 때에도 군사적으로 활용되었다. 덕적도와 함께 33km거리에 있는 팔미도도 그 대상이다. 팔미도의 등대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 2시간 전 불을 밝혀 상륙함정들이 인천항으로 진입하도록 해준 곳으로 유명하다.

팔미도의 등대를 켠 미해군 클라크 대위와 한국해군 연정  대위 등 특공대원들은 바로 덕적도로부터 선장 이성호 중령의 함정(PC-703호)을 이용 팔미도 등대를 밝히는 작전을 하였다.

충남 당진시 대호지면 적서리와 당진포리 <출처 : google map>

당군의 면천 백제수군 공격
소정방은 덕물도(덕적도)에서 6월 21일 신라 무열왕이 보낸 태자 김법민을 만나 작전계획을 하달했다. “나는 바닷길로 가고 태자는 육로로 행군하여 7월 10일을 기하여 백제의 서울 남쪽에서 만나 의자의 도성을 공격한다.”며 구체적인 기동방법까지 제시하였다.

소정방이 백제도성 남쪽에서 7월 10일 즉 20일 뒤에 신라군과 만나기로 한 것은 신라군의 육로행군을 고려한 시간이었다. 신라군이 주둔했던 경기도 이천에서 백제 도성 남쪽 즉 부여까지 209km정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닷길로 간다고 한 소정방의 일정에 의아한 점이 있다. 당군은 산동반도에서 덕물도까지 305km를 3일 만에 항해하였다. 이 속도를 유지한다면 덕물도에서 부여까지 205km이므로 3일이면 충분한 거리이다. 그런데 20일이 걸렸으므로 실제 항해에 소요되는 3일을 제외하면 17일간의 행적이 없다.

대부분 연구들은 당군이 덕물도에서 대기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여름이어서 덕물도에 정박하여 20일을 소비했다고 볼 수가 없다.

속전속결해야 하는 전장에서 배로 운송하는 군량을 소비해가며 20일간 정박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덕물도에 대기했다면 오히려 산동반도에서 늦게 출발했어야 타당하다.

다른 견해로는 동진강의 계화도에 상륙하여 휴식을 취하다가 백제군과 신라군의 치열한 전투가 끝나는 즈음해서 금강으로 진입하였다고 한다. 만약 당군이 금강 입구를 지나 남쪽의 동진강 입구 계화도까지 항해했다면 금강입구에서 노출이 되므로 군사학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당군이 덕물도에 머물지 안했다면 13만 명의 식량과 식수를 획득하기 위해 연안항해를 하면서 수시로 육지에 상륙해야 한다. 당군이 연안에 상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후대의 사료를 보자. ‘증보문헌비고’의 ‘면주도경’에 “석두성은 수군창고였다.

현경(顯經) 중에 당군이 바다를 건너와 난리로 창고를 폐하였다. 신라가 평정 후에 석두에 창고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면주는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일대이다. 석두성 수군창고라 함은 백제 수군기지가 있었다는 것이며 백제 수군의 식량창고였음을 알 수 있다. 현경은 656년부터 660년까지이므로 이 기간에 당군이 온 것은 660년 소정방뿐이다.

따라서 소정방은 법민을 돌려보내고 당진 면천에 있던 백제 수군창고를 공격하고 군량을 확보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를 보완해주는 전설이 해안과 내륙으로 전해지고 있다. 해안 전설로는 “삼국시대 당군 일부가 송악면 한진으로 상륙하고 일부는 난지도를 경유하여 내륙으로 침입하기 위하여 상륙한 곳이 방구암이다.

이때 백제군이 이를 알고 대기하고 있다가 격퇴하자 당군은 강 건너인 당진포리에 상륙하였다.”는 당진 대호지면 적서리의 방구암 전설이 있다.

내륙으로 전해지는 전설은 “소정방이 행군할 때 안개 속에서 길을 잃자 천개의 방을 가진 절을 짓겠다고 약속하고 치성을 드리자 안개가 걷혔다”는 예산 대술면과 공주시 유구읍 탑곡리의 천방사 전설이다. 두 지역은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사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 방구암 전설지역-백제수군창고-천방사 전설지역을 연결하면 덕물도로부터 공주로 가는 방향이다. 소정방은 덕물도에서 바다로 간다고 하였으나 20일의 여유시간을 이용하여 백제수군창고를 공격하여 군량을 확보하고 백제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예산방면 내륙으로 기동하였다. 즉 당군의 작전은 백제군을 혼란시키기 위한 양공작전이었다.

충남 예산군 대술면 천방산(인근에 유구읍 탑곡리가 있다)<출처 : Daum.지도>

신라군 경기도 이천에서 남하
덕물도에서 소정방으로부터 공격계획을 전해들은 법민은 경기도 이천으로 돌아와 무열왕에게 보고하였다. 무열왕은 김유신에게 명하여 5만 군사로 당군의 공격에 부응하도록 하였다. 이에 김유신과 신라 5만 군사가 경기도 이천에서 백제의 수도 부여를 향하여 남하를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군이 백제를 지나 북쪽까지 행군한 것과 다시 백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행군한 것은 군사용어로 기동이라 한다. 기동은 부대가 전투를 위하여 대형을 갖추어 행군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기동을 할 때 적을 속이기 위하여 허위로 행군, 즉 기동을 하는 것을 양동작전이라고 한다.

물론 신라는 소정방으로부터 명령수령을 위해 소정방의 지시에 의하여 경기도 이천까지 기동하였다. 처음부터 백제를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신라군의 경기도 이천까지의 기동은 결과적으로 백제가 속게 된 양동작전이 되었다.

백제의 대응
당군과 신라군이 6월 21일 회합한 덕물도에서 백제수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당진 석문방조제의 레이더 기지까지는 38km이다. 레이더 기지는 과거에 섬이었으며 고도는 80m이다. 오늘날도 날씨가 좋은 날에는 레이더 기지에서 덕물도가 육안으로 관측된다.

하물며 660년 당시에 덕물도에 나타난 2,000여 척이나 되는 나당의 대 선단을 백제수군이 포착하지 못할 리 없다. 따라서 2~3일 뒤에는 당연히 백제조정에 보고되었을 것이다.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신하들을 모아 군신회의를 개최하였다. 좌평 의직(義直)이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매 물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은 배에서 피곤해졌을 터이니 그들이 처음 육지에 올라 기운을 회복하지 못했을 때 갑자기 치면 됩니다. 그러니 당나라 사람들과 먼저 결전을 시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에 달솔 상영(常永)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와서 속히 싸우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습니다. 신라는 여러 번 우리에게 패배를 당하였기에 우리의 기세를 보기만 해도 겁을 낼 것입니다.

그러니 적은 군사로 신라군을 쳐서 예봉을 좌절시키고 나서 형편을 보아 싸우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의자왕이 결정을 하지 못하고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유배된 흥수(興首)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고마미지현은 전남 장흥에 비정되고 있다. 부여에서 274km이다. 의자왕의 사신이 주야로 달려갔다 왔다고 해도 5일 이상 소요된다.

백제가 5일 이상 회의만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없다. 분명히 어떤 조치를 하였을 터인데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다. 백제가 취했을 조치를 추정해보자.

백제는 6월 11일경 동원령을 하달하였고 약 6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분석하였다. 백제 군신회의가 개최되는 6월 23~24일 경에는 10일 이상 경과된 시기이므로 동원이 완료되어 있었다.

또한 달솔 상영이 의견을 말할 때 신라군이 우리의 기세를 보기만 해도 겁을 먹을 것이라고 하여 백제군이 상당한 병력을 동원해 놓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의자왕이 당군을 먼저 칠 것인지 신라군을 먼저 칠 것인지 결정을 못하고 고마미지현의 흥수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당군이 당진 면천의 백제 수군창고를 공격하고 예산방면으로 기동한 것이다. 결국 의자왕이 흥수에게 의견을 물으러 보낸 5일 사이에 당군이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에 백제는 동원된 병력의 주력부대를 당진-예산방면으로 투입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사료에 생략된 것이다.

6월 27~28일경 백제의 주력부대가 투입되자 소정방의 당군은 백제군의 투입상황을 보며 당진으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보령과 서천-군산을 거쳐 백제의 도성으로 향하였다. 결국 백제군은 당진 면천일대에 도착하였으나 당군과 이렇다 할 접촉이나 전투 없이 당진-예산일대에 흩어져 있다가 7월 18일 백제의 항복소식을 들어야 했다.

백제 동원령 선포, 당군이 공격, 백제군 투입 등 일정별 상황도

주력부대 투입결과와 교훈
당군이 수행한 당진 상륙과 백제 수군창고 공격, 예산군 대술면 방향 기동은 허위였다. 군사용어로 양공작전이었다.

북방으로 투입된 백제군이 당진-예산방면에 도착하였을 7월 9일 신라군과 당군은 이미 탄현(炭峴)과 백강(白江)(기벌포(伎伐浦))를 넘었다. 백제는 성충(成忠)과 흥수가 조언한 “다른 나라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탄현을 막고 수로로는 백강(기벌포)를 막으라.”고 한 요충지에 병력투입 시기를 상실한 것이다. 도성을 지킬 병력을 제외하면 요충지에 투입할 충분한 병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의자왕은 계백장군에게 결사대 5천명밖에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백이 죽자 남은 병력 수천 명을 모아 웅진구에서 당군을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황산벌과 웅진구 전투 후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을 공격하자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웅진방령의 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사로잡아 사비성으로 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당진-예산에 투입되었던 백제군이 거병한 예산군 봉수산의 임존성

결국 백제멸망의 원인은, 당군과 신라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병력을 운용했어야 했는데 양공작전과 양동작전에 대한 정보가 없어 작전에 실패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이와 같이 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전쟁성패의 중요한 관건이다. 즉 전쟁을 대비함에 있어서 작전을 위한 정확한 정보가 선행되어야 한다. 오늘날은 정보자산들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첨단 정보자산은 날로 발전되는 기술 때문에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자체 능력으로 부족한 부분은 첨단 정보자산을 운용하는 국가와 실시간대 정보공유 등을 통해서라도 대비태세를 구축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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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용 2019-09-07 18:30:39
역사를 쓸데는 확실한 증거자료와 충분한 학술자료(중국, 일본, 한국측 모두동원)를 가지고 써야 하는데
이재준 씨는 어용에다 소설적, 추정적 상상을 가지고 기사를 썼네요!

백제멸망에 대해서 나도 여러면으로 연구해본바, 정보력 부재, 양동작전에 의해 망한 것은 아니고
중과부적으로 나당연합군에 제갈량과 롬멜, 사마중달, 장량, 소하, 도고제독, 나폴레옹, 룬트슈테트원수, 구데리안 세계최고의 명장들이 온다고 해도 백제멸망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정보력 부재, 양동작전등에 의해 멸망했다는 것은 허접한 중령에 의한 상상일 뿐입니다.

또한, 삼국시대 백제라는 나라의 인구가 얼마인데 6만명에 대한 동원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이것도 신빙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당나라 군이 당진, 예산에서 노략질을 17일간 했다고 하는데

2018-05-27 13:39:46
백제가 한반도 에 없었다고 하는 자료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백제수도 충남부여는 아니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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