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의 눈] 은자(隱者)들의 땅 가야산
[시민기자의 눈] 은자(隱者)들의 땅 가야산
  • 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 승인 2018.01.10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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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굿모닝충청 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가야산은 고대 뱃사람들아 서해를 지날 때 길잡이 역할을 했던 내포(內浦)지역의 주산이다.

역사적으로 중국과 교류하는 가장 짧은 바닷길로 나라가 흥할 때는 신문물이 들어오는 물길로, 험난한 시기에는 외세가 내륙으로 들어가는 물길로,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시대부터 대중국 교역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교역로 기능을 했을 뿐만 아니라 대외활동의 창구역할을 하는 해안지대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 가야산 지역이다  

지리적으로 천수만과 삽교천을 따라 일찍부터 원시 신앙과 불교, 천주교 등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정착됐고 난세에는 은자들이 모여드는 혁명가들의 해방구가 돼 품어주던 곳이 가야산의 군왕곡이다. 가야산에서 가장 깊은 협곡이다. 지역에서는 구랑골로 불려진다.

은자들의 땅이었던 군왕곡은 석문봉과 백암봉의 그 아래 접근하기 어려운 협곡으로 예로부터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되는 요새와 같은 곳이다.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백제부흥군이 무대였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663년 백제 부흥 운동의 전개는 다양한 접근로와 퇴로가 확보된 가야산이 상당한 영향을 줬을 것으로 여겨진다.

임존성은 내륙에 위치해있고, 비교적 협소해 공격과 방에 취약하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접근로와 퇴로가 확보된 가야산에서 내려오는 백제부흥군의 전설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또 1170년 망이, 망소이(손청)와 1728년 이인좌 난의 핵심인물인 덕산 출신 박찬신과 황진기도 가야산 군왕골 백암사에서 세상의 변화를 꿈꿨다. 1894년 동학군과 1951년 빨치산들은 군왕곡을 차지했다. 이곳은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모여 살던 곳이다.

백암봉으로 표기된 고 지도

가야산은 내포지역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였다.
가야산에 사는 사람들은 군왕곡에 관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에 이곳을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주민들과 탐방객이 가야산을 오르지만 정작 이 협곡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오랜 시간 침묵을 강요당했지만 내포지역 근현대사의 아픈 빨치산 역사를 더듬기에는 가야산 군왕곡 만한 곳이 없다.

가야산에서 활동했던 빨치산들은 지리산에 있던 남부군의 소속이 아니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충남 서부지역의 남로당 출신의 공산주의들이(삽교송산 등) 옥량폭(곤양골)과 구랑골 골짜기 비트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낙동강, 지리산에서 전투의 패잔병들이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으로 돌아갈 도주로가 폐쇄되자 바닷길로 도주하기 용이한 가야산으로 도망쳤다. 상가리 쪽은 곤양골 옥양폭포의 중방바위를 경계로 군왕골까지 국군과 빨치산이 대치한다.

당시 빨치산의 본거지는 주민이 많이 살던 해미나 상가리가 아니고 구랑골과 직접 연결되는 강당골이다.

그들은 곤양골과 군왕골 깊은 계곡을 성벽 삼아 전투를 벌이며 합덕과 고덕 삽교 등 지역 출신 빨치산(남로당)들과 인민군이 9.28수복 이후까지 수개월간 그들만의 해방구가 됐던 곳이기도 하다.

빨치산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을 ‘해방구’라고 불렀다. 대한민국의 영토 속에 버젓이 인공기(人共旗)를 걸어놓고 공산주의 이념과 제도를 실행했던 곳이다.

1951년 서산군 운산경찰 지서장으로 빨치산 토벌대장이였던 변홍명 대장에 따르면 충남 빨치산은 3만 명이 넘어 자신도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전투를 했다고 한다. 특히 서해안의 운산 가야산이 빨치산 천국이라고 했다.

이 증언에서 빨치산의 활동은 마을 분들의 증언과 일치하지만 숫자는 과장으로 사실이 아니다.

당시 내포지역의 인구와 남로당원수 가야산의 규모를 볼 때 3만 명이 작은 협곡에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내포지역 4개 군에서 차출된 방위군과 경찰 상가리로 진출한 유엔군 등 토벌 작전에서 사살당하고 확인한 장교와 정치장교 등 숫자는 인민군 10 여명과 (토벌군에 포위되자 자폭) 고덕 합덕 삽교 등 지역 출신의 빨치산 포로는 72여 명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포로들은 가야산에 활동하다 수색 작전이 시작되자 도주한 빨치산은 300여 명 이상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어 그 기록을 신뢰할 수 있겠다.

당시 주민들의 피해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산자락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빨치산에게 쌀 한 되 퍼주기만 해도 통비(通匪)분자로 몰아 두들겨 패고 집을 불태우기 일쑤였다고 한다. 실제 산 쪽에 살던 사람 중 돕는(부역) 과정을 적극적이냐 수동적이냐에 따라 분류가 되어 종전 후 처형되거나 수십 년 후에도 마을에서 살지 못하고 신분을 숨기기 쉬운 대전과 서울 등지로 마을을 영영 떠나게 된다.

이렇게 6.25 당시 좌우 사상 대립은 많은 사람들에게 견디기 힘든 상처를 안겨주었지만 그 비극적인 무대였던 가야산은 말이 없다.

아직도 빨치산에 토벌 전에 참여하고 직접 피를 흘린 사람들이 마을에 거주한다.

물론 부역한 주민 중 일부는 돌아사기소, 일부는 멀리 도시로 떠난 경우가 있다. 또 마을에 남아 자신의 고거가 잊히길 기다리며 조용히 거주하시기도 한다.

6.25가 일어난 지 67년이 지났음에도 가야산의 빨치산 관한 연구는 물론이고, 전반적인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까지 시간이 흘러왔다.

아파하며 숨겨왔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오래 전부터 가야산 사람들은 곤양골과 군왕곡을 이야기를 꺼려했다. 사람들이 많이 죽어 한이 많은 이 땅에는 굴곡진 역사가 스며들어 있어서다.

이제는 좌우를 떠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한을 남긴 가야산의 빨치산을 객관적으로 연구해 후손들에게 알려줘야한다. 그래야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가야산에서 태을 묻은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 군왕골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가득한 상상 속의 협곡이다.

모진 세월의 민심을 담아내어 민중들에게 피난처이자 이상향이던 그 이야기는 전해지지 못하고 잊혀졌다.

제대로 묻힌 가야산 빨치산 역사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평가돼야한다. 드러나지 않은 내포지역의 슬픈 현대사다.

아픔의 역사든 찬란한 역사든 기록돼야 한다. 지역이 품어야 하는 우리의 역사이며 치유와 그 문화자원의 활용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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