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단군조선의 쇠망과 기후, 해모수의 등장
[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단군조선의 쇠망과 기후, 해모수의 등장
신화로 가려진 단군조선 - 하·은·주 3대(代) 교섭사 ⑦
  • 김탁
  • 승인 2018.01.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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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김탁 우리역사바로알기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전국시대 말기애 동북방에서 단군조선과 접경을 이루고 있던 제나라와 연나라는 각기 부국강병을 이룩하여 조선과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이게 된다. 이번 연재에서는 연나라와 기자세력의 등장에 초점을 맞추어서 <환단고기>의 기록을 토대로 중원세력과의 교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김탁 우리역사바로알기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한국상고사·민족사상 연구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대 정책대학원 고위정책과정 수료 Simple People Inc 대표

45세 단군 여루
정사33년(BC364), 연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여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언이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신미 47년(BC 350), *북막의 추장 액니거길厄尼車吉이 조정에 찾아와서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것을 청했다. 마침내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로 하여금 병력 만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上谷을 공격하고 이를 도와 성읍을 쌓게 하였다.*북막, 대흥안령 산맥 서북쪽 몽골 지역*상곡, 지금 북경 북쪽의 대동부를 상곡이라고 한다. 이 당시에 상곡은 어디를 지칭하는지 불명확하나 하북성 이현의 치소 혹은 하북성 경령현의 서쪽의 상곡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임승국 교수는 후자를 지목하고 있다. 무인54년(BC 343), 상곡의 싸움 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 오더니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造陽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 조양 역시 세곳이 있는데 산동성 장구현의 서쪽, 호남성 동현의 서남, 열하성 능원현 동쪽 대능하 大凌河의 서북쪽 가운데 임승국 교수는 세번째 열하성의 조양을 지목하고 있다.

46세 단군 보을
경진 원년(BC 341), 번조선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오가五加가 다투어 일어 났다.무술 19년(BC 323), 정월 *읍차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하여 번조선 왕이라고 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를 구함에 이를 허락 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

*읍차, 읍차는 기후의 관직명을 말한다. 13세 흘달단군조에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하니 은나라의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읍차는 군대를 통솔하는 장군의 직책으로 보인다. 이 당시 기후는 이미 읍차라는 관직명을 가지고 번조선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이 대목이 소위 기자세력이 번조선왕으로서 우리 역사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인데 <환단고기><태백일사>에 그 전후사정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중략) 병오년에 아들 가색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경진년에 아들 해인이 즉위하였다. 일명 산한이라고 했는데 이 해 자객의 시해를 당했다. 신사년에 아들 수한이 즉위했다. 임오년에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안촌골을 공격했다. 또 험독에서도 노략질을 하니 수유의 사람 기후가 자식과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 싸움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진, 번 2한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연나라 서울)의 남쪽에서도 싸우려 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공자(진개를 의미함. 필자 주)를 인질로 삼았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을축 46년(BC 296), 한개韓介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 부수었다. 단제께서는 서울로 돌아 오셔서 대사령을 내리셨는데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수 없었다, 단제께서 붕어 하셨는데 후사가 없음에 고열가가 단군 물리의 현손으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지라 마침내 즉위 하였다.*은나라가 패망후에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은나라 왕족인 기자의 이름을 서여라고 한다. 여기서 수유는 기자세력을 지칭한다.

번조선의 지배권을 기자세력이 장악하고 마침내 단군 보을이 다스리는 진조선의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고 단군의 지배하에 있던 각지의 제후국들이 세력을 얻게 됨에 따라서 단군조선의 국운은 점차 쇠약해져 갔다. 이러한 사실을 규원사화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열가 임금이 입하매 국용이 부족하여 봉가(단군8가의 하나)가 경기지방 고을에서 부세를 거둬들여 겨우 유지하다.....임금이 제가와 상의해 가로대 지금 왕실은 쇠미하고 권신들은 더욱 강성하고 제후들은 명을 받드는 자 거의 없다 하시니라....”

단군조선을 위협하는 세력은 번조선의 기후뿐만이 아니라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 역시 이에 가세하였다.

47세 단군 고열가
기유 44년(BC 252),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보내왔다임술57년(BC239), 4월 8일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 이었다 *고리국은 고리 혹은 구려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 고구려는 본시 고죽국이다 하는 귀절로 보아서 북부여와 이를 계승한 고구려는 그 발원지가 고죽국이며 고리국이라고도 부른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계해 58년 단제께서는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하여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일을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 라고 함을 볼때 고열가 단제가 퇴위하고 오가가 다스리는 공화정이 계속되다가 결국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함으로서 단군조선은 막을 내리게 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는 해모수의 등장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다. 수유후須臾候 기비箕丕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

이 대목은 단군조선 종말의 단초를 분석할 수 있는 중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한개韓介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했다”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군대를 일어켰다”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왕으로 삼았다”

결국 단군조선 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번조선을 장악한 기후세력의 협조를 받아서 단군이 은퇴하고 공화정을 유지하던 진조선의 단군직을 해모수가 접수 계승한데서 찾아 볼수 있다.

이와같은 추론은 <태백일사><북부여기>를 살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기사 8년(BC 232) 해모수 임금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북부여기>
경진 19년(BC 221)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였다. 연나라는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에 이르러 국경을 삼게하였다.

번조선과 진조선이 각기 기자세력과 해모수세력으로 지배권이 변동되는 와중에서 연나라와 국경을 마주 대하고 있는 번조선은 지속적으로 연나라와 긴장상태를 지속하게 된다.

연나라는 주나라 무왕의 동생인 소공 석을 제후로 봉한 나라이었다. 은나라를 토멸한 무왕은 동북방의 조선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전위국가를 세우고 친족들을 제후로 봉했는데 산동지방의 제나라, 노나라와 하북성, 산서성 지역의 연나라와 한나라가 전위4국에 해당이 된다. 연나라는 그 가운데 가장 약체에 속한 편이었으나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진나라와 결혼동맹을 맺고 부터는 동북방의 강자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전국7웅 가운데 가장 강성한 세력은 진, 조, 제, 초등 4강이었는데 이들 세력 상호간에 누구와 연합하느냐애 따라서 중원의 세력판도가 한쪽으로 기울어 지게 되어 있었다. 진나라 혜문왕이 BC 334년에 연나라를 포섭하여 제나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소진을 연나라에 파견하여 소위 세객정책을 펴게 된다. 이 때에 제나라에 영토를 빼앗기고 번조선의 침공에 시달리던 연나라 문왕이 소진을 적극 환영했다. 태자를 진나라 왕녀에게 장가들이고 결혼동맹을 맺음으로서 진,연 제휴가 이루어졌다, BC 332년에 진나라의 위세를 빌어서 태자가 왕을 칭하니 이가 곧 역왕(이왕)이다. 그는 제나라에 빼앗긴 10성을 돌려받고 번조선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연나라의 칭왕에 노한 번조선(기후세력)이 연나라를 치고자 하였으나 대부 예가 간하여 중지했다.

이처럼 조,연간에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와중에 일찌기 번조선에 인질로 잡혀와 있던 연나라 공자 진개가 번조선을 탈출하여 번조선을 공격하는 일대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위략의 기록을 살펴 보면<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옛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 되어 동쪽[기자조선]을 침략하여 땅을 빼앗으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도리어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나라 왕실을 받들게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대부(大夫) 예(禮)가 그와 관련하여 간언하자 이를 중단하였다. 조선후가 예로 하여금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토록 했는데, 이에 연나라도 전쟁 계획을 중단하였다. 이후 조선후의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는 이에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 조선의 서쪽을 공격해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조선은 마침내 쇠약해졌다”라고 전한다.

연나라는 일찌기 진,번 2한의 군대와 기후세력 5,000인의 공격으로 수도인 계성이 위태롭게 되자 공자 진개를 인질로 보냈다. 인질로 잡힌 진개는 겉으로 충성스러운 태도를 보이자 번조선왕이 매우 신임하여 그는 번조선의 실상을 파악하고 돌아와서는 번조선을 공격하였다. 이로써 번조선은 1,000리 혹은 2,000리를 퇴각하였다고 <삼국지><사기 흉노전><위략>등에서 전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고조선 성립이후에 지속적으로 중원지역으로 진출하던 단군조선 세력은 점차 위축되기 시작하였고 춘추전국시대라는 오랜 전란기를 통해서 부국강병책을 터득한 중원국가에 점차 밀리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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