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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 하정우의 실제 모델 '최환 전 공안부장'의 ‘생생 증언’

    <영화 <1987>에서 실제 모델 최환 전 공안부장 역할을 맡아 '최검사'로 분한 배우 하정우>

    [굿모닝충청 정문영 기자]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인 모멘텀이 되었던 사건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다.

    자칫 단순 의문사로 미궁에 빠질 뻔 했던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박종철 군의 시신 부검이 아닐까 싶다. 당시 검찰.경찰 등 권력자들은 서둘러 시신을 화장시켜 사건을 은폐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은 당시 최환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최 전 공안부장의 증언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12일 CBS <정관용입니다>에 출연, “솔직히 검사로서 남들 하기 어렵다는 공안부장까지 해서 더 이상 욕심 부릴 생각이 없었다”며 “사표를 내거나 끌려가기를 각오하고 소신을 지켰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날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재구성했다.

    -박종철 군의 사인에 의문을 가졌던 이유는.
    ▲밤늦게 다 퇴근하고 나밖에 안 남아 있는데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에 있던 분 2명이 급하다면서도와달라고 찾아왔다. 심장마비로 죽은 박종철 군의 아버지를 만나 “아들이 조사 받다가 그냥 쓰러져서 죽었다” 하니까 화장을 해달라고 했다고 말하더라. 화장해서 유골이 나오면 아버지가 장례를 치르겠다고 선선히 말했다는 거다. 그러면서 수사지휘권을 갖고 있는 내게 도장을 찍어달라고 시신 화장 합의서를 갖고 왔다. 미심쩍은 생각에 그동안 업무연락도 하던 사람들이라서, “나한테 못 할 소리가 어디 있냐. 다 털어놓아라”고 했더니, “고문은 안 했어요”라고 하더라. 내 입으로 고문이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런 말을 했다.

    -수사관들이 순순히 털어놓았나.
    ▲쇼크로 죽었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어떻게 보면 심장마비도 고문하다가 당하는 수도 있는데, 두 사람의 말이 갈팡질팡했다. 그래서 직감을 했다. 어떤 종류의 고문을 당했는지는 몰라도, 결국은 고문 때문에 죽은 것은 틀림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화장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돌려보내면서 “내일 밝은 낮에 정식으로 변사사건 발생 보고서를 써 가지고 오라”고 했다. 변사사건 발생보고서는 대공경찰이 쓰는 게 아니라 관할 용산경찰서장의 명의로 해야 한다. 그런데 그냥 돌려보냈다가는 그들의 완강한 태도로 봐서는 “사체가 없다. 화장하고 말았다. 제3의 경찰관이 잘 모르고 했다”고 딴소리라도 하면 큰 일 날 것 같아 ‘사체보존명령’을 내리고 돌려보냈다.

    -고위층에서 외부 압박은 없었나.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대공처장한테서 왔고, 직속 상관을 통해서도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쪽에서도 왔다. 그들은 은연중에 “대학생 하나 죽은 거 가지고 그렇게 복잡하게 하지 마라. 지금 시국이 개헌이냐 호헌이냐 하는 상황인데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라는 말을 들었다.

    -이후 변사사건 발생 보고서 처리는 어떠했나.
    ▲보고서를 들고 부처 상관인 검사장한테 갔다. 부처 상관이니까. 그분이 “공안부장 얘기를 들어보니까 나도 고문에 의심이 간다. 공안부장이 알아서 하라”고 재량권을 주셨다. 그런데 문제는 부검명령을 하는데, 경찰병원에서 영안실에 있는 시신을 내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부검을 위해 사체 압수수색 영장을 법원에서 받아왔다. 그런데 변사사건 발생 시 사후 처리는 공정성을 이유로 공안부가 아닌 형사부 검사가 한다. 그때 배정된  형사부 당직검사가 과거 새누리당 대표를 했던 안상수 검사다.

    -이후 시신 부검은 어떻게 진행됐나.
    ▲그 분을 내게 배속시켜줘서 경찰 병원에 있는 시신을 억지로라도 해서 한양대학병원으로 옮겼다. 당시 경찰병원은 왕십리에 있었고, 거기서 제일 가까운 게 한양대학병원이었다. 한사코 거부하는 것을 내가 설득했다. “아니, 경찰에서 조사받다 죽은 사람이고, 그래서 지금 고문 여부가 핵심 키 포인트인데, 경찰병원에서 부검하면서 경찰병원 의사가 나와 집도하고, 또 경찰 산하 기관인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을 해서 발표하면 그 결과를 누가 믿겠냐”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영화에도 시신 가져오라고 몸싸움하는 장면이 나오는 그대로다.

    -그래서 한양대병원에서 부검이 실시된건가.
    ▲정식부검을 한다고 해도 그대로 뒀다가는 똑같은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장소만 경찰병원에서 일반병원으로 왔다는 것뿐이지, 집도하는 사람이 같은 경찰 의사라면 안되겠다 싶어 한양대학부속병원장한테 다시 전화로 부탁했다. 부검 경험이 많은 의사 1명을 좀 지원을 해 달라고 하니까, 고맙게도 답해주셨다. 그래서 세 사람이 부검을 한 것이다. 부검을 하면서부터 안상수 검사를 파견, “거기서 특이한 소견이 나올 때마다 적어라, 좀. 의사가 보는 데서. 그리고 그 의사한테 일일이 사인을 받으라”고 했다. 그렇게 완벽하게 하니까 꼼짝을 못 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인권이 지켜진 거다.

    -그렇게 하기까지 두렵지 않았나.
    ▲검사 옷 벗을 각오로 했다. 솔직히 검사로서 남들 하기 어렵다는 공안부장까지 했으면 됐지, 더 이상 욕심 부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사표 내라면 사표 내고 혼 좀 나라고 하면 또 끌려가야지 어떡하냐. 그래서 각오를 했던 거다. 사람이 잘못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으면 몰라도,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 용인할 수는 없었다. 당시 상황은 고문도 많이 일어나고 있었고, 더 안타까운 것은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사가 많았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되려면 형사 절차, 사법 절차도 민주화되어야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운영이 안됐다. 나는 그걸 막는 노력을 했고, 그것을 위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표 쓰고 나가든가 끌려가서 조사받든가 그렇게 각오를 다졌다. 만일 이게 되면 그게 민주화의 단초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영화 <1987>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일이다. 젊은이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뒤늦게라도 젊은이들이 당시의 민주화 운동이라는 걸 아주 확실하게 이해를 하고, 그 뜻에 동참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도록 하는데 이 영화의 공이 굉장히 크다. 그런데 영화가 제작되기 전까지는, 박종철  이한열 열사에 대한 기억이 서서히 잊혀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들의 죽음이 우리나라 민주화에 단초를 제공해 문을 열어주었다. 어느 부서에 가더라도, 우리의 헌법적 가치를 보장하고 우리의 처신도 법치주의 맞도록 행동하고 감시해달라는 말을 부탁하고 싶다.

    정문영 기자  polo876@goodmorningc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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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레기 2018-01-16 16:51:17

      좌파연예인에.. 좌파영화..
      시체팔이... 이상한 정의...
      신물난다...
      스레기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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