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⑩ 황산벌 싸울아비는 화랑 운용전략에 패했다
[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⑩ 황산벌 싸울아비는 화랑 운용전략에 패했다
  • 이재준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8.01.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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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예비역 육군대령 영남대 한국군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굿모닝충청 이재준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은 전쟁을 예상하고, 외국의 군대가 쳐들어오면 침현과 기벌포에서 막으라고 왕에게 건의하였다. 나당의 침공이 시작되고 나서 흥수(興首)도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에서 막아야 한다며, 만약 벌판에서 진을 친다면 성패를 장담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백제의 5천 결사대는 요새지가 아닌 황산벌에서 진을 쳤다. 그리고 5만 신라군과 맞서 싸웠다. 5천 결사대는 5만 신라군과 네 번을 싸워 네 번 다 이겼다. 그러나 결국 황산벌은 5천 결사대의 무덤이 되었고 백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최후의 결전장이 되었다.

황산벌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백제의 5천 결사대를 싸울아비라고 부른다. 사실은 싸울아비라는 용어는 그 유래가 모호하다. 1962년 11월 20일자 동아일보 신문에 의하면 옛날 무사를 현대어로 바꾸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한편 백제의 싸울아비들은 백제가 멸망한 뒤 왜로 건너가 일본 사무라이의 원조가 되었다고 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오늘날 싸울아비는 각종 드라마나 소설, 백제문화제 등에서 백제의 무사로 통용되며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과 맞선 백제의 5천 결사대를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백제의 싸울아비로 표현해도 큰 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구려는 경당(扃堂), 신라의 경우는 화랑(花郞)으로 대표되는데 백제만 뭔가 내세울게 없어 싸울아비를 백제에게 부여한 것으로 보는 신문기사가 타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백제는 왜 탄현과 같은 요충지가 아닌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싸워야 했을까? 백제의 병력 수는 왜 5천명밖에 안 되었으며, 5만 신라 군사를 4번이나 이겼는데도 최종적으로 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의 화랑 운용전략은 무엇이었는가? 등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부여 삼충사 성충(표준영정 57호, 1994지정), 오태학 그림

성충과 흥수가 말한 탄현
656년 왕이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성충이 극력으로 말렸더니 왕이 성을 내어 그를 옥에 가두었다. 성충은 옥에서 말라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제가 늘 시국의 사변들을 관찰하건대 기필코 전쟁이 있을 듯합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는 침현(沈峴)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며 수군은 기벌포(伎伐浦)로 하여 험준한 곳들을 방어해야만 견딜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이 깊이 새기지 않았다.

660년 6월 21일 당군과 신라군이 덕물도에서 회합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왕은 군신들을 모아 싸워 지키는 방법을 토의하였다. 이때 좌평 의직(義直)이 말하였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응원을 믿기 때문에 만일 당나라 사람이 불리한 것을 보면 반드시 머뭇거리며 두려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나라 사람들과 결전하는 것이 옮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달솔 상영(常永)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들은 멀리 와서 속히 싸우려 할 것이니 들어오는 길을 막아서 그들의 군사가 피곤해지기를 기다리면서, 우선 적은 군사로 하여금 신라 군사를 친 다음에 형편을 보아 싸워야 합니다.” 하니 의자왕은 머뭇거리면서 누구의 말을 쫒아야 할지 몰랐다.

이때 좌평 흥수가 죄를 짓고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흥수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수효가 많을 뿐만 아니라 군사규율이 엄숙하고 세밀하며 더군다나 신라와 더불어 합작하여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진을 대치한다면 승패를 알 수가 없습니다. 백강(혹은 기벌포)과 탄현(혹은 침현)은 우리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 막아도 1만 명이 이를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날랜 군사를 선발하여 그 곳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白江)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사로 하여금 탄현(炭峴)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성문을 여러 겹으로 닫고 지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해질 때를 기다려서 치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흥수도 5년 전 성충이 제시한 탄현과 기벌포를 막으라고 하였다. 탄현의 정확한 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대전과 옥천사이이의 경계지역인 원치(遠峙)로 비정하고 있다. 원치는 식장산 부근으로 경기도 이천에서 남하하거나 경주로부터 백제로 들어오는 국경지대의 요충지에 해당된다.

부여 삼충사 흥수(표준영정 56호, 1994지정), 오태학 그림

황산벌에 진을 친 계백
하지만 대신들은 “흥수는 오랫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며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말을 채택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을 따라 배가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며, 신라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넘게 하여 소로길에 편대를 짓지 못하게 하고, 이러한 때를 타서 군사를 풀어 치면 둥우리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곧이들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당군과 신라군이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흥수의 말대로 신라군이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할 수도 없을 뿐더러, 대신들의 말대로 탄현을 통과할 때 편대를 짓지 못하게 공격할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의자왕은 계백장군에게 결사대 5천을 주어 황산(黃山)으로 나가서 신라군과 싸우게 하였다.

황산벌은 논산시 연산면 일대로, 부여로부터 탄현으로 비정되는 대전 동쪽 원치까지 거리의 2/3지점의 거리이며 벌판이다. 흥수가 평원에서 대결한다면 승패를 알 수 없다고 하였으나 계백은 평원을 택하였다. 계백이 선택한 황산벌은 신라군이 탄현을 이미 지난 상황에서 신라군을 저지하거나 격멸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병력 수이다. 황산벌에 진을 친 백제군의 병종이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로 구성되어 있다 하더라도 5천명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사대는 왜 5천명인가
결전의 장소인 황산벌에 투입된 백제의 병력 수는 신라군의 1/10일 수준이다. 백제는 평시 전투 시에 도성방어 병력을 빼고도 3만에서 4만의 병력을 출동시키곤 하였다. 그런데 5만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 도성으로 쇄도해 들어오고 있는데 황산벌에 왜 5천명만을 보냈을까?

신라의 행군부터 백제의 대응을 살펴보자. 백제는 신라군이 경기도 이천까지 행군할 때 국경지대인 보은을 통과하는 6월 11일경 병력 동원령을 하달하였다. 약 6만여 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약 2주가 지나고 6월 23~24일경 의자왕은 6월 21일 덕물도에서 소정방과 신라의 법민이 만나 백제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싸워 지키기 위한 군신회의를 개최하였다.

군신회의에서 좌평 의직과 달솔 상영이 싸우는 방법을 토의하였다. 그러나 당군과 신라군 중 누구를 먼저 칠 것인가로 두 사람의 의견이 달랐다. 이때 의자왕은 결정을 못하고 죄를 짓고 고마미지현에 귀양 가있는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물었다. 고마미지현은 오늘날 전라남도 장흥이다. 백제의 도성이었던 충남 부여로부터 약 274km의 거리에 있다. 고려시대 파발마의 최고속도 360리/일(129.6km/일)로 달린다 하더라도 왕복 5일 이상이 소요되는 장거리이다.
그런데 6월 22일 이후 당군이 당진에 상륙하여 당진 면천의 백제수군 창고를 공격하고, 예산방면으로 기동하기 시작하였다. 즉 백제가 흥수에게 자문을 구하는 사이에 당군이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당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백제가 앉아서 회의만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없다. 반드시 어떤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백제는 동원된 병력의 절반인 3만의 병력을 당진-예산방면으로 투입하였다. 이들이 뒤에 예산 임존성에서 거병한 백제 부흥군이다. 결국 백제는 주력부대를 이미 당진-예산방면에 투입하였기 때문에 계백에게 5천명밖에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부여 삼충사 계백장군(표준영정 55호, 1994지정), 오태학 그림

백제 싸울아비들의 최후
계백과 백제 싸울아비들은 요충지 탄현에서의 방어시기를 상실하고, 승패를 알 수 없는 황산벌에서 결전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벌판에서 신라의 5만 대군을 대적해야 하는 계백과 백제 싸울아비의 전투의지는 결연했다.

계백이 황산벌로 출전에 앞서 자기의 처자를 다 죽여 버린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5천 결사대에게는 “옛날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5천 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오늘날 우리들도 각자가 용기를 내어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하며 싸울아비들의 전의를 돋우었다.

계백은 김유신보다 먼저 도착하여 세 곳 요해지에 진을 치고 신라군을 기다렸다. 계백이 진을 친 삼영은 충남 논산시 양촌면 모촌리 산성(고도163), 산직리 산성(고도183) 그리고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 산성(고도157) 등으로 보기도 한다. 

신라의 김유신은 계백이 삼영을 설치한 것을 보고 세군데 길로 나누어 네 번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5천 백제의 싸울아비들은 5만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삼국사기』 계백(階伯)전에는 백제의 싸울아비 한 사람이 1천명의 사람을 당하지 못하는 자가 없으므로 신라 군사들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김유신은 신라의 화랑들을 투입하였다. 장군 흠순(欽純)의 아들 반굴(盤屈)이 죽었다. 좌장군 품일의 아들 관창(官昌)은 계백에게 잡혔다. 계백이 투구를 벗겨보니 나이가 어려 차마 죽이지 못하고 살려 돌려보냈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지 못한 것을 매우 한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다시 적진에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리라.”하고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고 다시 백제 진영을 향해 진격하였다.

관창은 또다시 사로잡혀 계백에게 끌려왔다. 이번에는 계백이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신라진영으로 보냈다. 신라의 좌장군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씻으며 “내 아들이 나랏일에 잘 죽었으니 후회할 것 없다.”고 하였다. 이를 본 신라 3군이 격분하여 북을 치고 고함을 치며 쳐들어가 공격하니 계백도 죽고 5천 싸울아비 결사대도 전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계백의 황산벌전투 장면, 민족기록화(오승우 그림) <출처:문화콘텐츠닷컴>

신라의 화랑 운용전략
백제의 싸울아비를 무너뜨리는 단초를 제공한 화랑은 삼국 간 항쟁이 치열했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신라의 교육제도의 결과이다. 화랑의 기록은 진흥왕 23년(562) 가야 정벌에 사다함(斯多含)이 참전한 기록이 처음으로 보인다. 화랑들은 귀족의 자제들 중 15~18세 된 청소년들로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면서 국토애를 기르는 한편 도의와 무예, 학문 등을 연마하였다.

화랑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한 것은 원광법사의 세속5계이다. 첫째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둘째는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셋째는 벗을 신의로써 사귀는 것이요. 넷째는 전장에 나가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는 생물을 죽여도 골라야 한다. 등 이었다.

당시 화랑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하여 이름을 남기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어진 재상과 충신이 화랑에서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화랑에서 양성되었다.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도 화랑출신이었다. 삼국통일까지 7대 왕조를 이어온 제도였다.

화랑 운용방법을 살펴보자. 화랑들은 전쟁터에 부자가 함께 출전하였다. 아버지와 아들 둘 중 어느 하나가 전사하게 되면 나머지는 더욱 분전하여 싸우도록 한 것이었다.

황산벌 전투 그림에 나타난 계백의 삼영과 김유신의 삼도(육군본부 소장)

화랑들은 전황이 불리할 때 투입하였다. 젊은 화랑들이 싸우다 죽는 모습을 군사들이 보고 결전의지를 키워 반전을 도모하기 위한 전략적 활용이었다.

또한 화랑들은 귀족의 자제들로 얼굴이 흰데도 불구하고 하얀색 분칠을 하였으며 복장도 화려하였다. 오늘날 적에게 노출되지 않으려고 검게 위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즉 적에게 표적이 되어 전장에 나가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신라의 화랑 운용전략은 군사들의 전투의지 고양전략이자, 불리한 상황의 반전 도모전략이었다. 결국 계백장군과 백제 싸울아비의 굳센 의지는 신라의 화랑 운용전략에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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