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⑨ 13만 당군은 일열종대로 오지 않았다
[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⑨ 13만 당군은 일열종대로 오지 않았다
  • 이재준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8.01.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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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예비역 육군대령 영남대 한국군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굿모닝충청 이재준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우리나라 교과서에 보면 660년 당나라 군대의 백제 침공로는 산동반도-덕물도-금강수로 등 일열종대로 도식되어 있다. 당시 당군의 병력 숫자는 ‘구당서’, ‘자치통감’에는 수륙 10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는 13만 명, ‘삼국유사’에는 12만 2,711명 1,900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3만 대군이 일열 종대로 왔다고 볼 수가 없다. 어떤 형태로든지 전개하여 왔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사료의 내용이 단편적어서 그 대형을 분석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군사학적으로는 얼마든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작전계획은 전쟁의 중요한 한 부분이므로, 전쟁의 본질을 고려한다면 실제 이루어졌던 침공계획에 근접하게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실려있는 소정방의 백제침공로

전쟁을 하려면 어떻게 싸우겠다는 작전계획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계획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먼저 부대를 목표지역까지 이동시켜야 한다. 목표지역까지 부대를 이동시키는 계획을 기동계획이라 한다. 즉 기동계획이란 목표를 확보하기 위하여 부대가 이동해가는 전술적 행군계획이다.

전술적 행군은 고대전쟁이라 하더라도 부대를 목표지역으로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현대전쟁과 큰 차이가 없다. 또한 고대의 기동계획은 무기체계 발달 및 국제정치적 여건이 복잡한 근대이후 전쟁에 비하여 파악하기가 용이하기도 하다.

당군이 고려할 수 있는 예상 접근로

이에 소정방의 기동계획을 현대 군사 교리적 측면에서 검토해보자. 그리고 그 결과를 과거 사료는 물론 소정방과 관련된 전설과도 비교 분석하여 검증해보자 한다. 이와 같이 한다면 사료에 전하지 않는 소정방의 백제 침공로 즉 기동계획을 어느 정도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현대 군사교리로 본 접근로
현대전은 부대가 어떤 목표를 공격할 때는 먼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접근로가 몇 개가 가용한지를 분석한다. 그리고 고려된 접근로들을 METT+TC 요소를 가지고 비교분석하여 가장 유리한 최선의 접근로를 판단한다.

METT+TC는 오늘날 군에서 군사전략이나 작전계획 수립 및 시행에 대한 평가를 위해 사용하는 분석의 틀이다. 그 요소는 임무(Mission), 적 또는 임무지역의 상황(Enemy Situation), 지형 및 기상(Terrain & Weather), 가용부대 및 능력(Troops Available), 가용시간(Time Available), 민간요소(Civil Affairs)를 뜻한다.

고대인 당시에 소정방은 먼저 덕물도로부터 공격목표인 백제도성 부여에 이르는 접근로를 요도와 같이 “1”,“2”,“3” 등 3개를 고려했을 것이다. 접근로는 순수한 지형만을 가지고 고려하기 때문이다.

이들 중 가장 유리한 최선의 접근로를 선정하기 위해 오늘날 교리인 METT+TC 요소를 적용하여 분석해보자. 당시는 고대이므로 민간요소인 [C]를 제외한 적[E], 임무[M], 가용부대[T], 지형[T], 시간[T] 등 지배적인 요소만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최선의 접근로를 선정했을 것이다.

당군 입장에서 도중에 배치되었을 백제군를 격파하며 목표에 도달하는 임무[M]를 완수하려면 접근로 “1”과 “2”가 단거리로써 유리하다. 그러나 시간[T]을 절약하고 속전속결한다는 차원에서는 육로보다는 수로를 이용하는 접근로 “3”이 더 유리하다. 하지만 접근로 “3”은 당연히 백제[E]에서도 입구를 차단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불리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육상 접근로인 “1”과 “2”가 가지고 있는 지형[T]적 측면의 산악에 의한 불리함을 극복하며 시간[T]를 허비는 것보다는, 당군의 가용부대[T]로 백제[E]의 대응을 쉽게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수로를 이용하는 접근로 “3”을 선택하여야 한다. 따라서 당군 입장에서 최선의 접근로는 “3”이다.

소정방이 남긴 전설 검토
‘구당서’등 중국 측 사료에는 소정방이 접근로 “3”인 금강수로를 이용한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660년 6월 18일 덕물도에 도착한 소정방이 7월 10일 백제 도성 남쪽에 도착하기 까지 20일이 소요되었다. 배로 항해할 경우 3일이면 충분한 거리를 20일 동안 항해한 결과가 되는데 그동안의 행적이 전혀 없다.

이러한 미스테리를 풀기 위하여 다시 현대 군사교리를 적용해보자. 현대 군사교리에서는 여러 가지 접근로를 비교분석하여 실제 사용할 접근로를 결정한다. 이를 최선의 방책이라고 한다. 이때 최선의 방책으로 채택되지 않은 다른 접근로라 해도 버려두지 않는다. 최선의 방책이 불가할 경우나 돌발 사태에 대비하여 우발계획으로 발전시킨다. 따라서 최종적인 접근로로 결정되지 않은 접근로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에도 충분히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한 단서들로써 당대 중국 측 사료에 기록되지 않은 후대의 우리나라 사료에 기록된 소정방 관련 전설들이 있다. 물론 전설 중에는, 소정방이 백제를 칠 때 백마강의 용이 비바람을 일으켜 강을 건널 수가 없게 되자, 백마를 잡아 낚시의 미끼로 사용하여 비바람을 일으키는 용을 낚아낸 뒤에 백마강을 건넜다는 전설이 있다. 이러한 부여읍 쌍북리의 조룡대 전설은 너무 허황되어 신뢰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전설이라고 해서 다 무시할 수는 없다.

먼저 인천시 남동구에 소래산(蘇來山)이 있다. 소래산의 지명유래는 삼국시대 말 소정방이 와서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지명유래는 소정방이나 그의 예하부대가 덕물도에서 소래산까지 어떤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이를 군사적으로 해석하면 덕물도와 소래산 사이의 구간에 북으로는 고구려 군을 견제하고, 남으로는 백제로 진격하는 1,900척 선단의 배후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소정방의 예하선단이 배치되었을 가능성을 시하하고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지고 있는 천방사(千房寺) 전설이 있다. 소정방이 행군할 때 안개 속에 길을 잃고 헤매게 되자 천개의 방을 가진 절을 짓겠다고 약속하고 치성을 드리자 안개가 걷혔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 전설이 반드시 소정방의 행군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소정방의 예하부대가 남긴 행군의 흔적이 소정방의 이름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전설이 조금씩 다르긴 해도 거의 유사하게 6군데나 전승되고 있다. 어떻게 동일한 전설이 여러 군데 전해지고 있을까? 지형적으로는 차령산맥을 따라 요도와 같이 일정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필시 어떤 연유가 있을 법하다. 이들 중 예산군 대술면과 공주시 탑곡리 천방사 전설은 당진 면천 백제 수군창고와 연결되어 있다. 목표지역 부여로 가는 예상 접근로 “1”에 해당된다. 이 축선으로의 기동은 앞에서 약 10일간 소요된 당군의 양공작전으로 추정하였다.

다음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와 청양군 대치면 천방골 전설지역은 보령 웅천지역으로부터 부여방향으로 연결된 축선이다. 더구나 웅천지역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당 소정방이 진을 쳤다는 미자진(尾資津)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자진은 지금의 보령시 웅천읍 황교리 부근 미조포(彌造浦)이다. 현재는 부사방조에 안쪽에 있다. 이들을 연결하면 수로를 제외한 육로에서는 부여로 가는 단거리 접근로이다. 지형만 가지고 예상 접근로를 분석한 단거리 육상 접근로인 “2”에 해당한다.

군산시 소룡동·해망동과 충남 서천군 시초면 산농리 절골에도 천방사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 지역은 금강입구의 좌우측으로서 당나라 군이 금강으로 진입하려면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지역에 해당된다. 지리적으로 볼 때 금강 진입하기 전 당군의 어떤 군사작전 활동이 반드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즉 수로를 이용한 접근로 “3”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소정방관련 전설들을 요도에 표시하면 위와 같다.
소정방의 백제 침공을 위한 기동계획 추정 상황도

소정방의 기동계획
중국 측 사료에는 소정방이 수로(水路)를 이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수로가 아닌 육상 접근로에 소정방 관련 전설이 유래되고 있다. 따라서 소정방의 예하부대였던 당군이 백제를 침공하면서 일정부분 육상에서도 작전을 실시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소정방의 백제 침공 기동계획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당군은 먼저 당진-면천 백제 수군창고-예산 대술면 까지 약 60km를 기동하였다. 면천의 백제 수군창고를 공격하여 군량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백제군은 유인하기 위해 예산군 대술면 및 공주시 유구읍 탑곡리까지 기동한 뒤에 다시 당진에 주둔하고 있던 선박으로 되돌아갔다. 육상에서의 행군거리 등을 고려할 때 왕복 약 10일이 소요되었다. 즉 6월 22일부터 7월 2일까지 양공작전을 실시한 것이다. 

당진에서 보령 웅천까지는 태안반도를 돌아서 연안항로로 약 118km이다.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에서 계산된 당시 선박의 평균속도 6.29km를 적용하면 18.7시간이 걸린다. 그러면 웅천 도착일정은 7월 3일이 된다.

보령 웅천에서 미산면 용수리까지는 약 10km, 청양군 대치면까지는 약 34km이다. 이 축선은 육상 접근로 “2”에 해당되며 부여까지 단거리 접근로이자 백제군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는 조공부대 작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보령에는 백제 수군 기록이 없다. 즉 당군은 백제 수군과 전투 없이 단순한 기동만 실시하였다. 따라서 웅천에서 천방사 전설이 전해지는 청양군 대치면까지 약 3일이면 충분하다. 일정상 7월 4일부터 6일정도로 예상된다.

웅천에서 서천 및 군산까지 연안항로는 약 50km이다. 조공부대의 정상적인 투입을 확인한 당군의 주력선단은 서천으로 이동한 후 7월 7~8일까지는 서천과 군산 양안에 상륙하여 주력부대의 금강진입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상륙작전을 하였을 것이다. 이를 견부확보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주력부대를 인솔하는 소정방은 서천 군산 양안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7월 8일경 목표 부여를 향해 금강으로 진입하였을 것이다. 이후 부여까지 약 45km의 강수로를 따라 기동하였다. 신라군과 백제 도성 남쪽에서 7월 10일 만나려면, 도중에 배치되어 있을 백제군과의 전투 등 어떤 지체시간을 고려하여 최소한 1~2일 전에는 금강으로 진입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금 성서격동(聲西擊東)
이와 같이 소정방은 백제를 침공하면서 주공작전 외에 양공작전, 조공작전, 견부확보 작전 등을 구사하였다. 백제는 이러한 작전을 수행한 소정방의 부대들 중 어느 부대가 주공작전 부대인지를 정확히 알고 대응해야 했다. 그러나 백제는 최초에 당진-예산방면으로 공격하는 부대를 당나라의 주력부대로 잘못 판단하여 자신들의 주력부대를 당진-예산방면으로 조기에 투입하는 과오를 범하였다.

물론 오늘날도 전쟁에 대비하여 이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으려고 적의 기도를 파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래서 각국은 적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인공위성이나 조기경보기 등 첨단장비를 구비하고 있다. 또한 국가차원의 상급부대 정보에 국한하지 않고 각급 예하부대도 각자 자기 부대의 작전지역이나 관심지역 및 영향지역까지를 망라하여 적에 관한 첩보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즉 전쟁이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말단 인간정보로부터 첨단장비에 의한 정보까지 종합 분석해야 하므로 그 체제를 구축하고 활용해야 한다.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전쟁에 임할 때 최소한의 노력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유사시에 대비한 정보기관 및 첨단장비 등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하는 역사적 교훈이다.

또 다른 교훈으로는 중국이 전통적으로 즐겨 쓰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법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동격서 전법은 동쪽을 공격하는 것 같이 하면서 실제는 서쪽을 친다는 계책이다. 고대부터 중국 병법가들은 이를 매우 중요시 했으며 손자병법을 비롯한 다른 병법서에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즉 당군이 실시한 당진 면천의 백제 수군창고 공격과 예산군 대술면까지 허위기동, 보령에서 부여방향 조공부대 투입 등은 성동격서 전법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오늘날 중국은 싸드와 관련하여 대한감정을 드러내며 실질적인 조치를 가하는 등 매우 소란스럽다. 이에 편승하여 우리 국내도 의견이 나뉘어져 덩달아 시끄럽기만 하다. 하지만 서쪽에서 일어나는 중국의 싸드 반응에 우왕좌왕할 때 동쪽 북한에서는 핵과 미사일을 완성했다. 이것은 중국이 사용하는 성동격서의 하나인 성서격동(聲西擊東)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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