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⑫ 최후의 항전과 협상, 의자왕은 반란군에게 잡혀왔다
[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⑫ 최후의 항전과 협상, 의자왕은 반란군에게 잡혀왔다
  • 이재준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8.02.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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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전성기 백제의 진출도 (사진은 ZUM 학습백과)
이재준 예비역 육군대령 영남대 한국군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백제의 계백장군과 5천 결사대는 660년 7월 9일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맞아 선전하였으나 결국 패하였다. 또 다른 백제군은 웅진구에서 당군을 막으려 했으나 뒤통수로부터 허를 찔리는 기습에 수천 명이 전사하였다.

나당연합군이 7월 12일 백제의 도성을 포위하였을 때 1만여 명이 도성 밖으로 나가 싸웠으나 모두 죽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되자 백제는 협상을 시도하였다. 협상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자왕의 둘째 아들 태(泰)와 융(隆) 등이 사비성을 지켰으나 함락되었다. 황산벌 전투 이후 4일 만인 7월 13일이었다. 사비성이 방어에 불리한 지형을 가졌다 하더라도 너무 쉽게 함락되었다.

한편 의자왕은 7월 13일 태자와 측근들을 데리고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다. 북방의 웅진성은 사비성과 달리 방어에 유리한 성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7월 18일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성의 영군들을 거느리고 사비성으로 와서 항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웅진성으로 피신한 왕이 5일 만에 다시 사비성으로 와서 항복했다는 점이 이해가 안 간다. 백제의 항전과 협상, 도성함락 및 의자왕의 항복에 관한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보자.

황산벌과 웅진구 항전
황산벌에서 계백장군과 5천 결사대는 5만 신라군과 4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신라는 화랑을 투입하였다. 계백장군이 신라의 화랑 관창을 사로잡고 보니 너무 어려서 살려 돌려보냈다. 하지만 관창이 재차 공격해 오자 이번에는 그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신라 군영으로 보냈다. 말안장에 실려 온 관창의 머리는 아버지 신라 대장군 품일의 소매를 피로 흥건히 적셔냈다. 관창의 주검을 본 신라군은 분기충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진격함으로서 백제군은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육로로 공격해 오는 신라군에게 5천 결사대는 황산벌에서 전멸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금강에서는 당군이 수로를 통해 공격해 오고 있었다. 백강을 지난 당군을 막기 위하여 백제는 황산벌 전투 후 웅진구를 막아야 했다. 이를 위해 금강과 논산천이 만나는 곳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하지만 당군은 배치된 백제군을 지나쳐 석성천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배치된 백제군을 후방으로부터 공격하였다. 웅진구의 백제군은 뜻하지 않게 당군으로터 기습을 받아 수천 명이 죽었다.

사비도성 항전
웅진구에서 백제군을 격멸한 당군은 밀려오는 조류를 타고 배들을 잇대어 북을 울리고 떠들면서 곧장 백제의 도성으로 돌진하였다. 소정방은 7월 9일 늦은 시각에 보병・기병들을 좌우에 끼고 곧바로 백제의 도성 20리 지점에 도착하였다. 이어 7월11일 황산벌 전투에서 시간을 지체한 신라군이 도착하였다. 물론 양군이 만나기로 약속한 7월 10일보다 늦은 7월 11일이었다. 양국 군대가 만난 장소는 충분한 공간이 있어야 된다고 가정하면 백제 도성으로부터 20리 지점의 부여읍 정각리 일대로 추정된다.

도성에 남아있던 백제 군사들은 나당연합군의 집결을 앉아서 구경만 하지 않았다. 고대전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안에서 나가지 않고 싸우는 농성(籠城)전투도 하지 않았다. 용감하게도 성 밖으로 나아가 싸웠다. 이 상황을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우리 군사들이 모조리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고 당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서 성에 육박하였다.”

당시의 또 다른 전투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소정방이 ‘□□□前(전)’하여 김유신이 달래어 두 군사가 네 방향으로 일제히 진격하였다”고 하고 있다. 원문에 빠진 글자를 일반적으로 ‘기불능(忌不能)’이라 하여 “꺼리는 바가 있어 앞으로 나가지 않아”로 해석한다.

어떤 번역본은 점괘가 좋지 않아서라고 해석하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백제가 모두 나와 싸우다 1만여 명이 죽었다는 기사에서와 같이 죽음을 불사한 백제군의 의지를 보고 꺼렸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백제 항전의 연원
최후까지 항전한 백제 싸울아비 정신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과거 백제가 중국의 요서(遼西)까지 경략했던 역사적 자신감의 발로였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백제의 요서경략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중국 사서인 송서(宋書), 양서(梁書), 남사(南史) 등에는 백제가 요서(遼西)를 점령하고 진평군(晉平郡)에 통치기관을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진서(晉書)와 자치통감에도 단편적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필경 백제의 요서경략은 사실일 것이다. 백제가 마지막까지도 18만 명의 대병력을 맞아서 끝까지 항전의 의지를 굽히지 않을 것을 볼 때 과거 요서경략으로부터 기인한 자신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침략군과의 협상
백제는 최후에 침략군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백제의 왕자가 좌평 각가(覺加)를 시켜 당나라 장군에게 철병해 줄 것을 애걸하였다.” “백제의 왕자가 또 상좌평(上佐平)을 시켜 고기로 사용할 가축과 풍부한 선물을 보냈으나 소정방이 물리쳤다.” “백제왕의 서자인 궁(躬)이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소정방을 찾아보고 용서를 빌었으나 또 거부하였다.” 등 3차례나 협상을 시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당연히 불가항력적인 힘의 차이를 느껴 할 수 없이 협상을 시도했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즉 동원된 병력의 절반이나 되는 3만 명을 북방으로 투입한 상태에서 황산벌, 웅진구, 도성방어 전투 등에서 연속적으로 패하여 성안에는 1만 명이 채 안 되는 병력과 부녀자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백제가 협상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당과는 어느 정도 대화나 교류의 여지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백제는 협상을 시도하면서 다른 계산을 하였을 수도 있다. 즉 당진-예산방면으로 조기 투입되어 있는 주력부대의 귀환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협상은 백제가 시간을 벌기위한 수단이었다. 주력부대가 복귀한다면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의자왕이 북쪽 웅진성으로 피신한 것도 주력부대의 복귀를 염두에 두고 시간을 벌기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협상은 실패했다. 소정방이 협상자체를 거부한 것은 나당군이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제의 전투력이 거의 소진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애초부터 협상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수 있다. 협상은 쌍방 힘의 균형이 대등하거나 상호간에 득실에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UN군, 중국, 북한 대표들

균형된 힘이 있어야 휴전협상
현대의 휴전협상 사례를 보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전후하여 전 전선에 걸쳐 북한군의 포격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3년 1개월 2일 1,192일간이나 지속되었다.

서울은 북한 침공 후 3일 만에 피탈되고 국군은 7월말에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여야 했다. 국군과 UN군은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한 달 넘게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였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더불어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으로 전환하였다.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진격하였다. 10월 26일 국경인근 초산에 태극기를 꽂고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을 때는 통일의 꿈이 실현되는 듯 했다.

그러나 10월 25일 이미 아군의 배후에 들어와 있던 중공군 25만여 명이 대규모 공세를 가해왔다. 결국 UN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중공군에게 내주고 37도선인 평택~제천~삼척선까지 철수하였다.

이후 UN군은 재 반격하여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4월에는 38도선 이북 철원까지 진출하였다. 이때부터 전선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38도선 일대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중공군 및 북한군과 UN군 및 국군의 힘이 대등하였는지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결국 양측은 군사적인 방법으로는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6월 23일 UN에서 소련대표가 휴전협상을 제의하면서 7월 10일 개성에서 첫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이후 2년여 만인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停戰協定)이 조인되었다.

휴전회담은 총성이 없는 또 다른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각급 부대의 전투는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어 협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유명한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저격 능선, 백마고지 등 주요고지 쟁탈전이 계속되었다. 이때 피해는 초기전쟁 못지않은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전쟁 발발 후 1년여가 지나 시작된 휴전협상은 2년을 끌었다. 이 기간에 전쟁이 더욱 치열했던 것은 휴전협상을 유리하게 끌고자 함이었다. 결국 국군과 UN군의 고지 쟁탈전에 힘입어 38도선 이북의 땅을 일부 회복한 선에서 휴전이 성립되고 지금의 휴전선이 되었다.

6.25 전쟁 때의 휴전협상과 비교해보면, 백제의 협상은 성립될 수 없는 사안이었다. 힘의 균형이 심하게 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는 장차 어떤 분쟁이나 국지전 등에 있어 불가피하게 출구전략을 찾는다면 반드시 힘의 균형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휴전협상이나 대화도 실질적인 힘이 즉 군사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비도성 함락
의자왕이 피신하고, 의자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측근들과 함께 밧줄을 타고 성을 넘어가니 태가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올라 당나라 깃발을 세우는 사태가 벌어지자 성문을 열고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7월 13일 이었다. 사비도성은 계백장군이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전투한 7월 9일 이래 4일 만이었다.

사비도성이 쉽게 무너진 데는 무엇보다도 병력의 차이이겠지만 지형적인 원인도 있다. 백제의 도성은 배후산성인 사비산성과 앞에 나성(羅城)으로 구성되어있다. 나성은 성(城)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언덕이나 평지위에 축조된 약 6.2km 길이의 담장 수준이다. 더구나 통상 산성들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 그러나 사비도성은 정반대인 배수임야(背水臨野)로써 방어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태였다.

예식진(禰寔進)의 묘지명 덮개(출처 : 다음 나무위키)

반란군에 잡힌 의자왕
의자왕은 660년 7월 13일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7월 18일에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熊津方)의 영군(領軍)들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사비성으로 와서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구당서’에는 “대장(大將)예식(禰植)이 의자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예식은 웅진방령이었다.

‘삼국사기’는 “왕이 웅진방령을 거느리고”라고 하였고 ‘구당서’는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라고 하여 두 사료의 주어는 정반대이다. 물론 한문 해석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의자왕이 스스로 와서 항복한 것이 아니고 웅진방령 예식이 데리고 왔다는 ‘구당서’ 기록이 타당해 보이는 후대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2006년 중국 산시성 당나라 고분에서 발견된 백제유민 예씨 일가의 묘지명 내용이다. 묘지명에는 “선조가 영가(永嘉)말(307~313)에 난리를 피해 동쪽으로 가서 집안을 이루었다. 북위와 남송사이의 전란와중에 준사(準泗)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 마침내 백제의 웅천(혹은 웅진)사람이 되었고, 백제가 당 조정에 조회하지 않자 그 왕을 이끌고 고종황제에게 귀의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즉 ‘구당서’에 기록된 웅진방령 예식(禰植)과 중국에서 발견된 묘지명의 주인공인 예씨 일가의 예식진(禰寔進)이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결국 웅진방령 예식이 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사로잡아 사비성으로 끌고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반란이 가능했을까? 당시 백제는 6만 명을 동원하였고 그 중 3만 명을 당군의 당진 백제수군 창고 공격에 대응하여 당진-예산방면으로 투입하였다. 웅진방령 예식은 백제가 회생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당에 귀의하기로 결심하고 반란을 도모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바다를 건너온 중국 태생이었다. 웅진방령의 반란은 의자왕이 활용할 수 있는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당연합군에게 4일 만에 사비도성이 함락된 것도, 의자왕이 웅진방령의 반란에 잡혀온 것도 백제의 주력부대가 이미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결정적인 시기에 활용할 수 있는 군사력이 없을 때 국가가 어떤 길로 가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교훈이다.

복원된 사적 제 58호 부여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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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김 2020-02-23 15:53:31
대단하고++예리한 사료=군사 전략입니다 감사 드립니다

김석한 2018-10-07 09:27:46
힘의 균형으로 압도적으로 북한을 이끌 대한민국이 북한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강력한 군이 있어야 협상도 이끌수 있고, 국가나 체제도 유지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데 자발적으로 군대를 약화시키고, 나라의 강력한 방패막이 미군도 물러나라는 또라이들이 설치고 있는 아이러니

송동섭 2018-02-03 10:18:53
우연히. "백제" 검색하면서 이처럼 좋은 내용 읽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자료입니다. 관련 자료들이 더많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널리 전파으면 좋겠네요. 백제의 역사를 통해서 현재의 우리를 깨닫게 함은 물론 백제에 자부심과 자긍심이 충만하도록 우리 후세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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