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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기자의 눈] 가야산 왕실 유적 체계적 관리 절실남연군묘 중심 유적 분포도 높아

    남연군묘 주변
    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굿모닝충청 이기웅 예산시민기자] 충남 가야산(예산군 상가리)에는 불교유적과 조선왕실 유적의 분포가 높은 지역이다.


    가야산의 중심에는 남연군묘가 있다. 남연군묘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묘소로, 개심사 말사인 명운암 처사 정만인과 오페르트 도굴사건 등 많은 이야기를 전해진다.

    남연군묘 위에는 상가저수지가 있다. 이곳에는 풍류를 즐길만한 장소가 많으며 바위에는 와용담(臥龍潭) 암각서가 써져있다.

    와룡담은 가야 9곡 가운데 제 7곡으로 넓은 바위에 예서로 글씨를 썼는데, 품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격조 있는 명필이 쓴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죽천 김진규가 1706년(숙종32년) 소론이 집권하자 덕산에 유배되는데 그는 가야구곡의 옥병계와 석문담, 와룡담에 글씨를 남기게 된다.  

    남연군묘 북쪽에는 상가리 미륵불이 있다.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돌기둥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미륵불로 불리지만 형태로 볼 때 관세음보살을 표현한 것이 분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에는 당초무늬가 장식된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관 가운데에는 작은 부처가 조각돼 있다.

    얼굴은 길쭉하며 양 볼에 두툼하게 살이 올라가 있다. 왼쪽 어깨를 감싸며 입은 옷은 선으로 새겼으며,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양팔은 몸에 붙인 채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었고 왼손은 손바닥을 배에 대고 있다. 이 양식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것으로 충청도 지방에 널리 분포돼 있다.

    또 남연군묘에서 북서쪽 능골 부근에는 커다란 귀부가 있다. 고려시대 이전 것으로 보인다.
    귀부의 비신은 법인국사의 귀부와 견줘도 연대와 예술성에서 앞선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아마도 예전에 이곳이 커다란 가람이 있었거나 왕사급의 비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연군묘 올라가는 옥계저수지 부근에는 흥령군묘, 헌종태실, 명빈 박씨와 연령군의 묘, 비(碑)등이 집중돼 있다. 이곳에는 선비들이 바위에서 즐긴 흔적이 많다.

    18세기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었던 병계 윤봉구(1683~1768)선생이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 떠 가야구곡을 설정했다.

    가야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아홉 구비 경치를 말하는 것으로 옥병계는 관어대에 이어 제 2곡에 해당되는 곳이다. 여기에는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의 세이암(洗耳嵒), 조선시대 죽천 김진규의 옥병계(玉屛溪)라는 글씨와 청송 송수침의 수재대(水哉臺) 등의 암각서들이 있다.

    옥계저수지 뚝방 부군에는 헌종의 태를 묻는 태실이 존재하고 있다. 이 태실은 1847년 석물로 단장했지만 태실비는 사라지고 귀부만 남았으며 태실의 둘레석도 사라졌다.

    이산표석 - 1918년 일제 총독부가 주인 없던 임야를 모두 자신들의 소유로 귀속 시키려던 수탈에 맞서가야산 상가리 일대가 조선왕실 소유 땅임을 표시하는 경계석이며 그 안쪽에는 묘지를 쓰거나 벌목을 금지하는 구역을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야산은 왕실에서 특별히 관리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왕실 유적을 표시하기 위한 이산 표석(李山標石)을 세워져 경계를 구분했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니 가장 먼저 남연군 신도비가 눈에 띈다. ‘숭정기원후4을축5월 일립’이라는 기록을 통해 1865년 5월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전체 4면비로 비의 상단 전면과 후면에 전서로 ‘남연군충정공신도비명’이라고 쓰여 있다.

    이 글씨는 남연군의 맏손자인 이조참판 이재원이 쓴 것으로 돼 있다. 전면 오른쪽에는 ‘유명조선국 현록대부 남연군 시충정공 신도비명 병서’라고, ‘성상이 즉위한 원년인 갑자년에 영의정 조두순이 건의해서’로 시작하는 비문이 이어진다.

    이 비문은 좌의정 김병학이 찬하고 남연군의 셋째 이들인 흥인군 이최응이 글씨를 썼다. 내용을 보면 김병학은 먼저 시호를 충정(忠正)으로 고쳐 내리게 된 연유를 쓰고 있다.

    비문에는 남연군의 가계가 자세히 설명돼 있다. 인조대왕까지 그 혈통이 이어지는데 그 처음을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에게서 찾고 있다.

    1788년 8월 22일 태어나 은신군의 양자가 됐고 1836년 3월 19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음을 밝히고 있다.

    묘는 처음 마전 백자동에 있다가 연천 남송정으로 이장했다. 그리고 1845년 다시 덕산 가야산 북록(北麓: 북쪽 기슭)으로 옮겼다가 1846년 3월18일 중록(中麓) 건좌(乾坐)에 안장한 것으로 돼 있다.


    슬하에는 자식이 4남 1녀가 있다. 장남이 흥녕군 창응이고, 차남이 흥완군 정응이며, 삼남이 흥인군 최응, 사남이 흥선대원군인 하응이다. 그리고 손자들이 있는데 맏이가 비문의 글씨를 쓴 재원이다. 흥선 대원군 맏아들은 재면이며 둘째 아들이 나중에 고종이 된 재황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명(銘)을 지었는데 문장이 ‘큰 기틀을 영원히 보살펴서 억만년 이어지소서(永佑鴻基時萬時億)’이다.

    그러나 1910년 조선이 망했으니 그 바람은 겨우 45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신도비를 지나다 보면 잔디밭에 남연군 묘표가 나타난다. 이곳에 보면 시호가 영희공(榮僖公)으로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남연군의 처음 시호가 영희공이었으며 나중에 충정공으로 바뀐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언덕으로 나 있는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남연군묘에 도달할 수 있다.

    이곳에 오르니 사방으로의 전망이 탁 트인다. 그리고 남연군묘 뒤로 가야산 줄기가 좌우를 웅혼하게 감싸고 있다.

    정말 명당임에 틀림이 없다. 아래로는 시원한 느낌이, 위로는 경건한 느낌이 몸을 통해 흘러간다. 묘역 또한 단정하게 벌초가 돼 있다.

    남연군묘는 봉분 왼쪽에 비석이 있고, 그 앞쪽으로 혼유석, 장명등, 양석, 망주석이 있는 형태이다. 봉분은 둘레석이 있는 단아한 모습이다. 봉분 왼쪽 비석에는 충정공 완산 이씨 이구와 그의 부인 여흥 민 씨의 묘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뒤에 세운 날짜를 보니 1865년 3월이다.

    이 글씨는 흥선 대원군이 썼다. 또 하나의 왕실유적으로 가야산과 상가리에는 왕실의 소유임을 알리는 특별한 표석이 있는데 이산(李山)이라 각자돼 있다.

    이산(李山: 조선왕조의 산)은 이왕산(李王山)의 준말이며 조선시대 가야산의 상가리 일원에 남연군묘를 중심으로 조선왕실 소유의 토지의 경계를 알리는 경계 표지석을 말한다.

    재질은 화강암 돌로 돼 있다. 다듬어진 부분은 높이 30㎝ 가로 세로 13㎝ 직사각형으로 앞면엔 이산(李山)이란 한자로 음각돼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길이가 약 60cm정도 되는데 거칠게 다듬어 송곳 같은 형태로 땅속에 깊이 파묻게 만들었다.

    가야산의 상가리에는 1970년대까지 남연군묘를 중심으로 밭과 논 뚝 주변에 이 표석이 많았다.

    과거에는 이 표석을 흔하게 볼 수 있었지만, 최근엔 그렇지 않다. 경작이 늘어나면서 돌무더기 속이나 일부는 기념물로 반출되고 훼손돼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1918년 총독부의 조사령에 의해 조선왕조와 인연이 깊던 현종태실과 남연군묘가 있던 가야산 등 전국의 임야는 조선총독부의 소유지가 된다.

    이에 조선왕조는 남연군묘가 있는 가야산의 상가리 일대 곳곳에 이산이라는 표석을 세워 가야산이 조선왕실의 (전주이씨종친) 사유재산임을 내세워 조선 총독부의 재산으로 넘어가는 것을 모면했다.

    안영중청원서- 1922년(임술) 10월 초 덕산군 전 군수 안영중과 유학 김봉식, 김진구 등이 전 궁내부 대신시장관 이재극에게 올린 청원서이다.야산의 왕실의 토지는 왕족인 이기용이 예산에서 지내며 상당수가 매각되는데 그 토지를 뒤찾기 위해 당시 덕산군수는 궁내부대신에게 청원서를 올리기도 한다.

    조선왕실 사무를 총괄하는 창덕궁은 일본 총독부에 사유지 이의서를 제출하고 가야산 일대에 조선 왕실의 소유지라는 표시로 표(標)항(杭)인 이산표석을 세우는 한편, 가야산 일대의 조선왕실 소유의 토지를 사유지로 신고한다.

    그 결과 조선왕조 소유의 임야는 1924년 창덕궁에 소유권이 이전됐다. 이산 표석은 일제강점기 조선왕조 소유의 산림과 임야 약탈 때 창덕궁이 소유권(왕실)을 표시하며 저항의 역사적인 산물이다.

    이산 표석을 통해 왕조 체제의 해체 과정과 식민지 상황에서 왕실 소유의 토지가 어떻게 관리되는지를 보여준다.

    조선시대에는 임야에 대한 소유 개념이 없었다. <경국대전>에는 ‘산림을 개인이 점유하면 볼기 80대를 때린다’라고 명시돼 있다. 이른바 공산무주(公山無主) 원칙을 지켜왔다.

    다만 임야에 관한 배타적 이용이 금지돼있을 뿐 누구든지 주인 없는 임야에 출입해 가축 방목, 연료 채취, 토석 채취, 수렵 채집을 할 권리가 인정됐다.

    일제강점기에 개인의 재산으로 등록되지 않은 임야는 모두 조선 총독부의 재산으로 몰수하는 법이 시행됐다.

    일제는 군사·학술상 필요한 보안림에 준하는 국유림은 ‘요존치 임야’로 나머지는 ‘불요존치 임야’로 분류해 관리했다. 국유림에 속한 촌락공유림과 분묘림은 일본인 등에게 선심 쓰듯 내줬다.

    당시 전체 임야의 50%가 총독부 소유로 됐다가 다시 일본인 개개인에게 불하됐다. 그 시절에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임야를 등록하지 않고 사용하다 자신의 땅을 빼앗긴 억울한 백성도 많았다고 한다. 

    한편 애초에 가야산의 상가리 쪽의 임야와 토지는 제주목사 박성식의 사폐지로 사위인 윤봉구에게 상속됐다.

    윤씨 일가의 토지는 손자인 철보대까지 100여 년간 온전히 소유권이 보존됐다. 하지만 가야산에 대원군이 남연군묘를 면례하며 윤봉구의 토지는 대원군의 회유와 강압에 의해 헐값에 빼앗기게 된다. 대원군에 의해 1846년 가야산은 조선시대 왕가의 땅이 되며 조선왕실의 소유가 된 것이다.


    이기웅  woolees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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