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섭의 그림읽기] ‘미소를 짓게 하는’ 높으신 분의 부탁
[변상섭의 그림읽기] ‘미소를 짓게 하는’ 높으신 분의 부탁
청화백자 잔받침
  •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예진흥부장
  • 승인 2018.03.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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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 잔 받침’(17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예진흥부장 직무대리

[굿모닝충청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예진흥부장] 부탁, 잘하면 괜찮지만 잘못되면 구설에 휘말리기 십상이다. 요즘 높으신 분들 부탁이 청탁이 돼 망신 당하는 사람이 한둘인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탁이 없을 수야 없지만 ‘청화백자 잔받침(17세기)’에 쓰여진 부탁의 글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청화백자 잔받침에는 그림 대신 정갈한 해서체의 시 한수가 쓰여 있다. 다섯 자와 두 자씩 4방 8방 짝을 이뤄 쓴 글을 보니 명문이다.

조선 중기 아버지, 아들까지 3대가 대제학을 지낸 이명한(1595-1645)의 글이다.

구성도 뛰어나 디자인이 강조되는 현대 작품이라고 해도 전혀 빠지지 않을 정도로 세련미까지 갖췄다.

시의 의미는 이렇다. ‘표주박 잔은 소박하고 옥 술잔은 분에 넘치게 사치스러워/ 눈보다 더 하얀 사기 술잔을 사랑한다네 / 땅이 풀리는 봄이 오니 왠지 목이 말라/ 잠시 꽃나무 아래서 유하주나 마시려 하네.’

궁중 그릇을 공급하는 사옹원 봉사에게 부탁 형식을 빌린 시인데 윗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예의를 다 갖췄다. 지엄한 고급 관료의 부탁인데 강요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봄날 갈증을 덜어줄 술잔 부탁을 에둘러 표현한 핑계의 너름새가 참으로 곰살궂고 인간미가 넘친다.

예의를 다 갖춘 높으신 분의 밉지 않은 부탁에 거절이 웬 말인가. 되레 기분을 좋게 한다.

봉사는 종 8품의 하급 관리다.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이 하급 공무원에게 하는 부탁인데 신분이 엄격했던 시절 예의를 갖춘 것을 보면 이명한의 사람 됨됨이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 봉사는 아마 새해 첫 가마에서 나온 태깔 좋은 잔을 골라 기꺼운 마음으로 바쳤을 것이다.

아쉽게 미담이 얽힌 청화백자 술잔은 사라지고 잔받침만 남아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일갈을 한다. 상대방에게 기분 좋게,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는 부탁이라면 적어도 적폐로 비난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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