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위만의 등장과 한무제의 조선침공
[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위만의 등장과 한무제의 조선침공
고조선의 분열과 열국시대의 개막 ①
  • 김탁
  • 승인 2018.03.2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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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격변기의 동북아 정세
BC 3, 4 세기는 역사상 일찌기 보지 못했던 큰 변동이 중원과 동북 만주지역에서 일어나는 시기이었다. 이 시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략적인 변동상황을 짚어보는 것이 논지의 전개상 도움이 될 것이다.

동북지방에서는 하,상, 주 3대에 걸쳐서 2천여년간 병립해 오면서 절대강자로 군림했고 공고한 3한관경으로 이루졌던 고조선 체제가 점차 와해되고 삼조선이 각기 분립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BC 239년에 진조선은 47세 고열가 단군을 마지막으로 2096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해모수에게 대권이 넘어갔다. 이것을 북부여라고 한다. 부여라는 국호는 BC 425년에 44세 구물단군이 즉위하면서 이미 대부여로 개칭한 상태에서 해모수는 진조선의 대권을 접수하고 부여라는 국호를 계승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서 BC 323년에는 번조선에서 읍차 직위에 있던 기후가 번조선 왕 수한이 후사가 없으므로 군령을 대행하고 스스로 번조선왕이라고 칭하고 진조선과 함께 연나라에 대항했다.

읍차는 지방장관이나 장군을 칭하는 말이다. 참고로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수명이 1908세라고 한것은 초대 단군왕검으로 부터 국호를 대부여로 개칭한 44세 구물단군까지의 연대를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 뿐이다. 다시말해서 단군왕검이 개국한 BC 2333년부터 구물단군 즉위 BC425년까지의 기간이 1908년이라는 계산이다.

이 시기는 연나라와 제일선에서 각축을 벌이던 번조선이 쇠퇴하고 기후세력과 위만이 차례로 번조선의 지배권을 차지했다

이 때 중원지방에서는 주나라 왕조는 완전히 명맥이 단절되고 전국 7웅이 각기 쟁패를 다투는 군웅할거의 시대가 되었다.  진왕 정政이 BC 230년에 가장 약체인 한나라를 시발로 하여 차례로 6국을 멸망시키고  9년만인 BC 221년에 드디어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중원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나라는 15년간의 단명으로 끝나고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가 등장한다. 중원에서는 진한秦漢시대를 기점으로 이전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시대성이 나타나게 된다.

즉 진시황까지는 모든 역대 창업왕조나 제후들의 선조들은 한결같이 3황5제에 뿌리를 두고 있던 귀족출신이었다. 그러나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부터는 귀족이 아닌 평민출신이 지배자로 등장한다.

이것은 중원역사에서 엄청난 시대적인 변화인데 일반적으로는 봉건시대의 종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다더 엄밀하게 말하면 동방 배달계 귀족지배시대의 종언이고 소위 피지배층이었던 평민 한족이 지배자로 둥장하는 대변혁기라고 할수 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해를 돕기위하여 간단히 연표를 만들어 보면 아래와 같다

동북아 격동기의 정세
- BC 341 번조선왕 해인이 연나라 자객에게 암살당함
- BC 339 고조선(진한 번한)과 기후세력의 협공으로 연나라가 패하고 연공자 진개 조선(동호)의 불모가 되다
- BC 323 기후 번조선 왕이 되다 (이 시기부터 기자조선이라고 함, 위만에게 탈취 당할 때인 BC194년까지 6대 129년간 존속했음)
- BC 311 진개 탈출하여 번조선을 침공. 서방 2천리를 차지함. 진개는 연나라 소왕 재임시의 인물( BC313-BC279)
- BC 230 진시황 천하통일 전쟁 착수. ( 한(BC230), 조(BC228), 위(BC225), 초(BC223), 연(BC222), 제(BC221)를 차례로 멸망 시키고 40세의 나이에 천하통일 완수)
- BC 222 연나라 멸망
- BC 221 번조선(기자조선) 기준왕 죽위
- BC 210 진시황 사망
- BC 206 유방 한나라 건국
- BC 195 번조선의 기준왕은 연나라 망명객 위만을 박사에 봉하고 상하장을 떼어서 봉함
- BC 194 연나라에서 도망온 위만이 번조선(기자조선)을 탈취.   한나라에 의해서 봉해진 연왕 노관 흉노로 투항.  부하장수 위만은 번조선으로 도망하고 기준왕을 속여서 번조선 탈취하다
- BC 147 한무제 등극. 북방으로 흉노, 서역, 남월 등 정복전쟁 개시.
- BC 109 한나라 사신 섭하가 조선의 비왕 장을 살해함으로 조한전쟁(한사군 전쟁 촉발)
- BC 108 위만조선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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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나라의 건국과 위만의 번조선 탈취
진나라는 짧은 통일천하시대(BC221-206)를 마감하고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가 BC202년에 다시 중원지방을 통일했다. 이 때  유방은 죽마고우인 노관을 연왕(춘추시대의 연나라는 BC 222년에 멸망했음)으로 봉했는데 유방을 배반하고 흉노로 달아나 버렸다.

노관의 부장이었던 위만은 BC 195년 번조선의 기준왕에게 의탁하고 박사를 제수받고 상하장을 지키도록 봉함을 받았다. 노관은 번조선으로 귀순할 때에 상투를 틀고 호복(조선인 복장)을 입었다고 한다.

상하장上下障은 연나라와 번조선의 경계선으로서 옛 진의 공지라고 하였다. 춘추시대의 연나라가 망하고 그후에 진나라와 한나라를 거치는 혼란한 시기에 어느 누구도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비워둔 땅이라고 하여 진고공지 秦故空地<사기 조선열전>라고 표현했다.

한나라는 건국하고 나서 조선과의 경계선을 패수로 했기 때문에 패수를 건너서 위치한 상하장은 번조선의 영역에 속했다고 볼수 있었다.

또한 연나라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중원지역의 전란과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서 "수만명"이 상하장 지역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다스리기 위한 목적으로 위만으로 하여금 상하장을 다스리게 했던 것이다.

위만은 이들 망명세력을 규합해서 연나라의 침공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기준왕을 속이고 번조선 왕검성을 탈취하고 준왕은 바다로 도망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을 우리는 학교에서 위만조선이라고 배웠다. 이와같이 중원 대륙에서 진한秦漢의 대결, 연나라와 번조선의 전쟁, 기후와 위만의 등장, 해모수의 등장과 진조선의 붕괴과정에서 수많은 한족계와 조선계 유민들이 발생하였고 이들은 보다 안전한 후방인 요동, 한반도로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환단고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중략)....기비가 죽으니(경진년 BC221) 아들 기준箕準이 즉위했는데 정미년(BC194)에 떠돌이 도적인 위만衛滿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마침내 바다로 들어간 후에 돌아오지 않았다" <번한세가>

"병오45년(BC195)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니 (북부여)단제께서 이를 허락치 않으셨다. 단제께서는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북부여기 상>

위만조선 기사

<북부여기>에 해모수 단군 재위연도에 기록된 내용을 몇가지 더 살펴보면, 계미 22년(BC219), 창해역사 여홍성黎洪星이 한韓나라 사람 장량張良과 함께 진나라왕 정政을 박랑사博浪沙<하남성 박랑현 동남에 위치>가운데서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부차副車를 박살내다.

임진24년(BC209),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어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장雲障에 갈라 살게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 하였다.

기해38년(BC202),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난하이다.

병오 45년(BC195),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신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해모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치 않으셨다.

단제께서는 스스로 병으로 인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고 상하 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이해 겨울 단제께서 붕어 하시고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 지내니 태자인 모수리가 즉위 하였다.

3. 북부여와 위만의 대결
번조선은 기후(BC 323)이후 6대에 걸쳐서  129년간 존속하다가 연나라 망명도적인 위만에게 탈취당했음은 앞장에서 언급했다.  위만이 지배하던 번조선, 즉 위만조선의 성격에 대해서는 어려가지 견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삼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자 않는 편이다.

일제는 단군조선을 말살하기 위하여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 지배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  위만조선부터 한국사를 기술했다. 이에 반해서 민족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위만을 도적이라고 하여 번조선(기자조선)을 찬탈한 배반자로 보았다.

이와같은 견해는 휴애거사 범장이 지은 북부여기에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북부여 해모수를 계승한 모수리, 고해사, 고우루 단군 재위기록에 위만을 도적떼로 규정하고 토벌전을 수행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이 당시 진조선을 계승한 부여인의 민족의식이 어떠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2세단군 모수리 재위
"정미 원년(BC194), 번조선왕은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엿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한뒤 바다로 들어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卓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中馬韓 이라고 한다. 이에 이르러 변卞, 진辰  두한韓도 역시 각각 자기들이 받았던 땅 백리를 가지고 수도로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무신2년 (BC 193),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중국 요령성 해남의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 침범하지 않았다.

기유3년(BC192), 해성海城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高辰을 시켜 수비케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주어 구제 하였다.

3세 단군 고해사
임신 원년(Bc169), 정월 낙랑왕 최숭崔崇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 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해모수 병오(BC195)년의 겨울 이었다. 계축 42년 (BC128)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려성南閭城에서 쳐 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한무제

4. 힌무제의 침공과 위만조선 우거왕의 최후
위만이 BC 194년에 번조선 기준왕 정권을 탈취하고 손자인 우거왕 때에 한무제의 침공으로 BC 108년 우거왕이 피살당할 때까지 86년간 번조선을 지배했다.

위만은 북부여와 대항하면서 중원지방과 동북지방의 교통로를 장악하고 중계무역을 함으로서 경제적인 부강을 이룩하고 한나라에 대한 견제세력으로서 역할을 했다.

이 때에 한나라는 정복군주인 한무제 유철이 등장해서 북방 흉노를 정벌함으로서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한 이래 북방 훈족(흉노)에 조공을 바치던 관계를 역전시겨버렸다.

당시 중원의 한족 입장에서 볼 때에 북방 흉노와 동북방의 조선은 가장 크고 강성한 적대세력이었다. 중국 문헌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동호 東胡라는 호칭은 흉노와 조선을 한갈래로 보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무제는 사신 섭하를 파견해서 우거가 복속하기를 요구했고 이 과정에서 섭하가 피살됨으로서 드디어 한사군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북부여기>에 나타난 부여와 우거, 한나라의 관계를 살펴 살펴보면,

4세 단군 고우루 재위
"신유원년(BC 120)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토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侯로 삼았다."

"계해 3년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병인 6년 단제가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니 구려하九黎河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 왔다."

"정묘7년(BC114) 목책을 좌원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려에 두어 이로써 뜻하지 않는 사태에 대비케 하였다."

<우거왕은 토착 조선인 최에게 살해당하다> "계유13(BC108) 한漢의 유철劉撤이 평나平那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 시키더니 4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高豆幕汗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 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서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우거를 죽인 것은 한무제 유철의 군대가 아니고 우거의 통치를 받던 원주민 조선족 최崔에 의해서 살해 되었고 다음의 반항자 성기成己를 죽인 것도 역시 조선족에 의해서였다. 한나라의 침략이후에 우거가 살해당하였기때문에 한나라가 우거를 멸망시킨것으로 이해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북부여기>에서 "한나라 유철이 평나를 노략질 했다"고 한 <평나>는 "번조선의 왕험성이 있었던 현재 하북성 산해관 남쪽 창려지방으로 평나 역시 그 부근" 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로써 기자조선, 위만조선이라고 칭하는 번조선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사기>와 <한서>에서 말하는 소위 한사군 시대가 된다.

다음장에서는 한사군 전쟁의 경과와 한사군의 실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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