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요하의 작은옹달샘] 나이 일흔에 처음 찾은 제주 4·3사건 유적지
[지요하의 작은옹달샘] 나이 일흔에 처음 찾은 제주 4·3사건 유적지
  • 지요하 소설가
  • 승인 2018.04.05 08: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요하 소설가

[굿모닝충청 지요하 소설가] 3월 19일∼21일 제주도를 다녀왔다. 복막투석을 하며 사는 처지이기에 중앙보훈병원 주치의의 별도 처방을 받아야 했다. 아침 6시에 12시간용 투석액을 한 번 주입하면 하루 종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이번 제주도 여행은 지난해 4월 혼인한 아들과 며느리의 계획 덕분이었다. 내 칠순을 기념하여 가족여행을 하자는 제의였다. 건강상의 문제로 외국 여행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제주도 여행은 가능하기에 쾌히 응낙했다.

제주도 여행은 이번이 네 번째다. 1999년 가족여행을 했고, 2005년엔 성당 행사로 제주도곳곳을 구경했다. 2012년엔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위해 투쟁하시는 문정현 신부님을 후원하기 위해 제주도 땅을 밟았다.

먼저 두 번은 단체 행동을 해야 해서, 또 세 번째는 일정이 촉박해서 제주 4.3사건 유적지를 가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 네 번째 제주도 여행길에서는 맨 먼저 ‘너븐숭이 4.3기념관’을 순례했다.

제주 ‘너븐숭이 4.3기념관’

칠순 기념 제주도 ‘가족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너븐숭이4.3기념관’을 순례했다. 제주도를 네 번째 찾은 길에 처음 너븐숭이4.3기념관을 순례하는 것이 죄스럽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나이 일흔에 다시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70년 전 내가 태어나던 해에 발생했던 제주4.3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관을 참배한 일은 참으로 뜻 있는 일이었다. 나는 전에 세 번이나 제주도를 찾았으면서 한 번도 4.3사건 유적지를 찾지 않았던 것을 죄스러워했고, 나이 일흔에야 다시 와서 맨 먼저 4.3사건 유적지를 찾아 참배하는 것을 크게 다행스러워했다. 제주 4.3사건의 실상은 이미 청년 시절부터 소상히 알고 있었다. 1978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 삼촌>을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가슴이 절절이 아팠다. 작품을 읽는 내내 비탄과 통탄, 한탄으로 가슴이 먹먹했다.

제주 출신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은 1948년의 제주 4.3사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현기영의 이 소설로 제주 4.3사건의 전모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고, 유적지 조성과 피해자 추모의 전기가 마련됐다. ‘너븐숭이 4.3기념관’은 2009년 4월 1일 개관됐다. ‘너븐숭이’란 제주도 토속어로 ‘넓은 쉼터’라는 뜻이다.

제주 4.3사건은 해방 이후 고향으로 귀환한 6만 명에 이르는 도민들의 실직 상태와 생필품 부족, 흉년에 따른 기근, 일제 강점기 때 왜경이었던 사람들이 미군정 시절에도 계속 경찰관으로 행세하는 것과 서북청년단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주요 배경이었다.

1947년 3월 1일 제주 북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삼일절 기념식 때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자 주민들이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쫒아갔다. 이를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했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경찰에 대해 크게 적개심을 갖기 시작했고,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했는데. 이것이 4.3사건의 발단이었다.

이때부터 군대와 경찰, 서북청년단의 대대적인 ‘빨갱이’ 토벌 작전이 전개되어 이듬해까지 1만5천여 명이 학살되었다. 당시 전체 도민 30만 명 중에서 1만 5천여 명이 희생되었으니 초상집이 거의 한 집도 없는 실정이었다.

사건 초기에 경찰도 피해를 본 사실과 관련하여 양비론을 결부시키는 시각도 있다. 공권력과 주민, 양쪽 다 피해자라는 관점이다.

나는 외지에서 군대가 투입됨으로서 사태가 더욱 커지고 희생자가 대거 발생한 사실을 주목한다. 나는 4.3사건 하나만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4.3사건을 통해 베트남전장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도 떠올리고, 1980년의 광주학살도 연관 지어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 이념의 광포함

나븐숭이 4.3기념관 앞에는 4.3사건 때 희생된 8살 이하 어린이들의 묘역도 있었다. 어린이들 중에는 젖먹이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한국군에 의해 페하가 된 마을도 보았다. 내가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한국군의 만행을 참전 선배 병사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마을로 외출을 나갔던 한국군 2명이 베트콩의 기습으로 사망한 후 한국군이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벌여 온 마을 주민을 집단 사살하고 가옥들을 모두 불태웠다는 것이다.

폐허가 된 마을을 보면서 외국 군대가 들어오는 나라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8년 동안 5,8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베트콩이나 월맹군이 아닌 양민들도 적잖이 희생시켰다. 오늘날 베트남 곳곳에 ‘한국군혐오비’가 세워져 있는 것은 한국군의 양민 학살을 반증한다.

베트콩이라는 오인 시각을 결부시켜 베트남 양민들을 학살했던 전력이 있는 한국군은 1980년 자국의 광주에서도 ‘빨갱이’ 또는 ‘폭도’라는 시각을 결부시켜 수많은 시민을 학살했다. 광주학살의 주범인 전두환과 노태우, 최세창 등은 베트남 참전 부대 지휘관 경력도 가지고 있다. 일종의 관성이 작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1980년의 광주를 떠올릴 때마다 베트남 전쟁 참전 때 직접 보았던 전두환의 대령 시절 모습을 떠올리곤 하는데, 어느 모르는 ‘전우’이기도 하지만, ‘살인마’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제주4.3사건에도 군복 입은 살인마들이 있었다. 정치군인들인 김창룡, 송요찬, 유재흥 등이 있었고, 그 정점은 이승만이었다. 그리고 제주4.3사건도, 또 광주학살과 베트남 양민 학살도 밑받침이 된 건 이성을 마비시킨 이념이었다.

나이 일흔에 다시 제주도에 와서 처음으로 ‘너븐숭이 4.3(추모)기념관’을 둘러보면서 가해자들 쪽에 일방적으로 작용한 이념의 만행이 얼마나 광포한 것인지를 전율하듯 상기했다. 그리고 희생자들의 넋 앞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며 기념관 근무자에게 한마디 할 수 있었다.

“제가 오늘 제주도에서 맨 먼저 가장 중요한 곳을 와봤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