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도학과 의리 정신을 실천한 개혁정치가
[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도학과 의리 정신을 실천한 개혁정치가
⑭ 대전의 인물-김정
  • 자료제공 : 대전 평생교육진흥원
  • 승인 2018.04.0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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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 선생 유적지
김정 선생 묘소 안내문

▲김정(金淨)
·생몰연대 : 1486년(성종17)∼1521년(중종16)
·묘    소 :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 2동 268-5

생애
김정은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이다. 김정의 자는 원충(元沖), 호는 충암(冲庵)·고봉(孤峯)이며, 본관은 경주(慶州)로 보은 출신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특출난 재질이 있었고, 재주와 슬기가 뛰어나 말을 배움에 곧 문자를 알아 10살이 되기 전에 이미 사서삼경에 통달하였다. 1504년(연산군10) 19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고, 1507년(중종2)에 22세의 나이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보임되고, 홍문관수찬,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병조정랑·홍문관부교리·헌납·홍문관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중종9)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때 왕의 구언에 응하여 1515년 7월에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아울러 국모를 폐위시킨 사건의 주모자 박원종(朴元宗) 등 반정 공신들의 죄에 대해서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도리어 왕의 노여움을 사서 곤장 100대를 맞고 그 해 8월에 보은 함림역(報恩 含琳驛)에 귀양 갔다. 1516년 3월 조광조 등의 간언으로 풀려 나왔다.

얼마 뒤 충암은 박상(朴祥)과 함께 재등용되어 사예(司藝)·응교(應敎)·전한(典翰) 등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고 속리산(俗離山)에 들어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서 3년간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뒤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도의(道義)의 교분을 나누었다. 그는 조광조와 중요한 일들을 의논하며 도왔다. 이 때 명을 받들어 부승지, 도승지,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고,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과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14)에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관직을 사양하고 돌아가 봉양할 것을 상소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오히려 형조판서(刑曹判書)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특진되었다. 이때가 김정이 왕의 신뢰를 받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 일찍이 사림세력을 중앙조정에 추천하였고, 조광조(趙光祖)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그 뒤 조광조와 함께 현량과(賢良科) 설치, 소격서(昭格署)를 타파하여 사전(祀典:제사의 의식)을 바로잡고 향약을 간행하여 백성에게 법도를 가르쳤다. 정국공신(靖國功 臣)의 위훈(僞勳)을 추삭(追削)하여 훈척(勳戚)의 세력들을 근절시켰으며,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정치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급진적인 개혁정치는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파의 불만을 초래하여 큰 화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 중종14)이다. 이 사화로 말미암아 김정과 대사헌 조광조 등 18명이 일시에 붙잡혀 투옥되어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간청으로 겨우 죽음을 면하고 처음에는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진도(珍島)를 거쳐 다시 제주(濟州)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辛巳誣獄, 1521년)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명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그 해 10월 사약을 받고 죽었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이후 1545년(인종원년)에 복관되었고, 1646년(인조24)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또한 시문(詩文)에도 능하였을 뿐 아니라 그림에도 능하여 새·짐승 등을 잘 그렸다. 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김고(金顧)·최여주(崔汝舟) 외에 조카인 천부(天富)·천우(天宇) 등이 있다.
저서로는 그의 글을 모아 만든 『충암집(冲庵集)』이 전해지고 있다. 김정의 9세손 상협(商協)이 유사(遣事)를 모아 놓은 것을 그의 아들 성태(聖泰)가 1845년 (헌종11)에 간행하였다. 본 문집은 기묘사화와 도학정치(道學政治)의 내용 및 제주도의 풍물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이다.

김정 선생 부인 정려
김정 선생 묘

대전(大田)과 김정
중종 때는 대전이 사림파의 새로운 근거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특히 중종때에 실시된 현량과의 급제자를 분석해 보면 확실히 드러난다. 당시의 현량과 급제자는 모두 28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충청도 출신이 8명이나 되었다. 이는 사림세력이 충청도 지방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김정이다.

김정은 대전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그는 18세 때 계족산의 법천사에 들어가 공부했던 적이 있다. 이때 문장을 잘 지어서 송여해의 칭찬을 받고 친분이 생긴 인연으로 그의 조카와 결혼했다. 청년기부터는 대전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이처럼 경주김씨는 본래 중종때의 사림인 김정과 김광유가 은진송씨에게 장가들면서 대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구와 대덕구 지역에서 살았으나 17세기 초부터는 진잠, 탄동 지역에서 살아왔다.

열녀 송씨부인

김정의 부인인 송씨부인은 쌍청당 송유(1389-1446 : 대전 지역의 은진송씨 가문이 터 를 잡는데 기여한 조선 전기 학자,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고가 인 송유의 별당인 ‘쌍청당’은 대전 유형문화재 제2호임)의 현손녀로 진사 송여익의 딸이 다. 충암 김정이 제주에서 사사(賜死)되자 같이 세상을 떠나려 하였으나 늙은 시부모를 모시고 있어 자결을 못하고 효도로 부모를 공양하였다. 이후 시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8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런 효심을 후세 사람들에게 본받게 하기 위해 1803년 (순조3)에 정려를 내렸다.

충암 김정의 유허
정암 조광조와 더불어 왕도정치의 새 시대를 열고자 개혁 정치에 참여하였다가 안타깝게도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정의 묘소가 있다. 김정의 묘소가 있는 일원은 1991년 7월 10일 대전광역시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이 되었다. 묘소는 대전 동구 신하동 요골마을 작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김정의 묘소는 예전의 대덕군 동면 내탑리에 있었으나 1978년 대청댐 공사로 그 곳이 수몰지역이 되면서 이곳 신하동으로 옮겨왔다.
자료제공 : 대전 평생교육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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