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숨] 2014 기억의 숫자를 세다 0416
[세상의 숨] 2014 기억의 숫자를 세다 0416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 기획 - 세상의 숨 ④ 2014.4
  •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 승인 2018.04.2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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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초원선생님을 만나는 김성욱씨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김성욱씨

[굿모닝충청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 사람에게는 숫자가 있다. 나이, 전화번호, 생년월일, 번지수 등. 숫자는 편하게 기억하게도 하고, 많은 말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게도 한다. 많은 사연을 담은 숫자 중에서도 우리 사회를 먹먹하게 하는 숫자가 있다. 0416. 4년 전의 그날이다. 4번째 4월 16일에 앞서, 그를 만났다. 단원고 희생 학생 부모님 앞에서 울 수 없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다가 성대가 상해 인공 성대를 한 사람, 딸의 순직을 인정받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3년 넘게 거리에서 싸운 사람, 故 김초원 선생님의 아버지 김성욱 씨다.

#1006, 안산을 떠나다
김성욱 씨는 안산에서 살다 2016년 10월 6일, 고향인 경남 거창으로 집을 옮겼다. 어머니가 사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언덕배기에 자그마한 집을 지었다. 방 한 칸, 아담한 거실. 필요 이상의 물건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소박한 살림을 두고 김성욱 씨는 필자를 맞이했다.

“집이 좁죠? 아내와 둘이 살기는 딱 좋아요. 둘이 사는데 거창하게 살 필요 없잖아요? 이렇게 삽니다.”

거실 한 편에 김초원 선생의 사진과 강아지 인형 한 쌍이 놓여있었다. 생전 김초원 선생은 강아지를 참 좋아했다고 한다. 딸이 언제 어디서든 보고 귀여워하라는 아버지의 뜻이었다. 황색의 작은 강아지 인형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 부드럽고 온기가 남아 있었다.

“안산에 있을 때는 아무래도 세월호 유가족들이 많잖아요.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있어요. ‘보상금 얼마 받았냐, 그 돈 다 뭐했냐?’ 꼭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있더라고요. 사람들을 만나기 싫었어요. 도망 온 셈이죠. 산에 염소 열댓 마리를 풀어서 키우고 있어요. 진돗개도 암수로 사서 키우고, 닭도 키우고요. 그런데 동물들에게 기다림이 있어요. 계란도 20일이면 부화하고, 염소도 새끼를 낳고, 강아지도... 새 생명의 기다림이 느껴지는 거에요. 굉장히 슬플 때도, 동물들과 함께 있으면 슬픔이 조금 잦아들고 그래요.”
 
 

고향집으로 내려간 김성욱씨
세월호 순직 공무원 묘역

#45, 딸의 꿈
김성욱 씨는 아직도 김초원 선생의 교원자격증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했던, 173센티에 달하는 키에 늘씬한 몸매, 성격도 명랑했던 딸이 군인이나 경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딸은 아빠의 생각과 달랐다. 굳이 ‘선생님’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딸은 어릴 때부터 꿈이 선생님이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땐가 담임선생이 화학 선생이었는데, 그분이 너무 좋았나 봐요. ‘나도 그런 선생님이 되야겠다.’고 생각해 그때부터 장래희망이 된 거죠. 학생들이 좋데요. 지금도 생각나는 게, ‘아빠 나는 뼈가 으스러져도 선생님이 되고 싶어’라고 했던 말이에요. 그래선지 단원고에 부임하고 나서, 주말에도 쉬지 않고 학생들을 만났어요. 빵도 고기도 사주고. 친언니처럼 그랬데요. 1대1로 상담을 하면 단 한 번도 반말을 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늘 존댓말을 써주던 선생님이셨데요. 천생 선생이죠. 그런데 너무 일찍 끝나서...아빠는 그게 안타깝죠. 부임 45일 만에 영원한 수학여행을 떠나버렸으니까. 몇 개월만, 조금만 더 좋아하던 선생님 노릇도 하고 가면 좋았겠는데 시작도 전에 그래서 굉장히 안타까워요.”

#0416, 생일
그렇게 제자들을 좋아하던 故 김초원 선생은 아이들 곁을 영원히 지켰다. 세월호에서 김초원 선생과 다른 선생들은 5층에 머물고 있었다. 5층은 화물기사, 선원 들이 있던 곳으로 가장 많은 생존자가 탈출한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故 김초원 선생은, 아이들을 구하러 4층으로 내려갔다.

“오전 8시 CCTV 영상을 보니까 선생님들은 식사시간에 밥도 안 먹었어요. 밥 먹는 아이들 지도하느라고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그러다 여덟 시 삼십 몇 분쯤 됐을 거에요. 화물기사 한 분이 나중에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배가 기울어갈 때, 우리 딸을 봤데요. 4층으로 내려가더라는 거에요. 나중에 보니까, 학생들 구명조끼를 다 나눠줬습니다. 선생님들은 못 입었죠. 아이들이 불안해하니까 진정시키고, 구명조끼 다 입히고 그러다가...”

사실 4월 16일은 김초원 선생의 생일이었다. 전날 학생들은 선생님을 위한 깜짝 생일 파티를 열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안. 4월 15일 밤 11시 59분이 지나고, 4월 16일이 되자 학생 한 명이 故김초원 선생님께 다급히 찾아갔다.

“16일 날 12시가 되자, 5층 선생님 숙소에 가서 한 학생이 배가 아프다고 했데요. 김초원 선생이 다급하게 놀라서 내려왔죠. 알고 보니, 학생들이 미리 케이크를 사서 준비를 해 온거에요. 같이 생일 노래 부르고, 사진 찍고, 목걸이랑 귀걸이를 학생들이 선생님께 선물로 줬어요. 김초원 선생이 올라올 때, 학생들이 선물한 목걸이 귀걸이를 그대로 하고 있더라고요. 몸은 조금 축축했는데, 평온해 보였어요. 눈을 감은 모습이...”

故 김초원 선생님을 그리며

#0330, 의로운 죽음을 위해
故 김초원 선생님의 아버지 김성욱 씨의 말투는 부드럽고도 단단했다. 딸 김초원을 그릴 때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지만, 김초원 선생의 이야기를 전할 때는 한 치의 주저함과 불명확함이 없었다. 늘 전교 1등을 도맡았다던, 4년간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졸업했다던 김초원 선생의 강단이 누굴 닮았는지 짐작이 가능했다.

김성욱 씨는 희생교사 대표로 3년 하고도 30일을 정부와 싸웠다. 잘 나가던 직장도 그만 뒀다. 이유는 기간제였던 딸의 순직을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업무지시를 받고, 똑같이 세월호에서 학생들과 영원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순직’이라는 당연한 일이 똑같지 적용되지 못했다. 참사는 그 이후에도 남겨진 이들에게 이어지고 있었다. 국회며, 인사혁신처며, 교육부며 누구든 만나 순직을 인정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했다. 국민들의 서명도 받으러 전국을 다녔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해줄 수 없다’는 말 뿐이었다. 3년 하고도 30일. 캄캄한 빛도 없는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다는 김성욱 씨. 그에게 딸의 순직은 어떤 의미였을까?

“순직을 인정 못 받으면 그냥 억울한 죽음이 되잖아요. 그것 뿐이에요. 보수 언론들은 순직을 인정받으면 돈이 나온다고 하는데 따로 그런 건 없어요. 순직이 안됐으면, 지금 납골당에 있을 거에요. 먼 훗날에도 그냥 ‘죽음’으로 기억되죠. 의로운 죽음이 아니잖아요. 저는 우리 딸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사랑하는 학생들을 지키며 최후를 맞은, 자랑스러운 딸이에요. 딸에게 의로운 죽음,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싶었어요.”

아버지로서 당연한 얘기구나 하면서도 콧잔등이 시큰거린다. 그 당연한 일을 위해, 아버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싸웠다. 누군가는 ‘돈’ 때문이라고, 누군가는 ‘보상’ 때문이냐고 수근거렸지만 아버지는 딸만 바라보고 3년 30일을 거리에 나섰다. 아버지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누구나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힘겹게 싸운 날이면, 숨어 울다 목소리도 잃었다. 지금 김성욱 씨는 인공 성대 삽입 수술을 한 상태다.

“뒷산에서 소리치고, 이불 덮어쓰고 울다 보니 어느 날 목이 잠기더라고요. 의사한테 갔죠. 성대가 녹아 내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왜 이러는지 원인을 모르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나중에 ‘제가 세월호 유가족입니다.’ 했더니 그제야 ‘아...’ 하시더라고요. 지금은 그래서 조금 쉰 목소리가 나옵니다.”

3년 30일이라는 시간도, 목소리도 모두 내던졌다. 딸의 의로운 죽음이라면. 모두 내던질 수 있는 게 부모이리라. 또 이렇게 쓰면서, 부모인 필자는 과연 그럴 수 있는지 사뭇 의심이 든다. 김성욱 씨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고개가 숙여지며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다.

#0418 예견된 선택
故 김초원 선생은 4월 18일에 올라왔다.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선생님들은 대개 학생들보다 일찍 올라왔다고 한다. 만약 시간을 돌려 그날로 돌아간다면, 아빠는 딸에게 어떤 선택을 하라고 했을까?

“우리 딸은 18일 날 떠올라서 20일 날 장례를 치렀어요. 그리고 19일부터 학생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죠. 오전에 장례식 치르고 차에서 울고 있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학생들이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단원고에 찾아가서, 학생들 명단을 달라고 했어요. 명단을 보고 장례식장을 돌았어요. 무릎 꿇고 부모님들께 빌었어요. ‘담임선생님이 당신 아들딸을 제대로 인솔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학생들 부모님이 그러더라고요. ‘왜 아버님이 사과하시냐고,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희생 학생 부모님과 같이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김성욱 씨는 예견했다. 전화를 받고 급히 진도에 내려간 그는, 생존자 명단을 끝내 쳐다보지않았다. 우리 딸은 비겁하게 아이들을 두고 살아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성욱 씨는 말을 이었다.

“그때 만약에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안 구하고 다 살아나왔다면, 우리나라 교육은 어떻게 됐을까요? 비겁한 선생님, 나만 살고 보자는 교육 분위기가 생겼을 거에요.”
 
#0514 첫 꿈
2017년 5월 15일. 고향에 내려와 누나와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던 중, 김성욱 씨는 의문의 전화를 받았다. 김성욱 씨를 취재했던 한 기자의 전화였다. 그는 전화를 채 끊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2017년 5월 15일 정부가 故 김초원, 故 이지혜 선생님의 순직을 인정했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전날, 그에게는 더 반가운 일이 있었다. 야속하게 한 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은 딸이,  5월 14일 밤 아버지의 꿈에 나온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가요. 2017년도 5월 15일 날 순직을 인정받았잖아요. 15일 새벽에 자는데 우리 딸이 온 꽃밭이에요. 꽃동산에서 우리 딸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더라고요.”

그리고 그날 아침 김성욱 씨는 대통령에게 전화를 받았다. 3년 30일 간의 외로운 싸움, 학생들을 구하려 내려가 평온히 잠든 채 돌아온 딸, 보상금과 돈으로 왜곡하던 위선자들, 거리에서 함께 해주던 시민들까지. 모든 숫자가 뒤엉켜 생각나 그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지금 故김초원 선생은 국립대전현충원 세월호 순직 공무원 묘역에 잠들어 있다. 아버지는 딸의 의로운 죽음을 인정받아,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된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말한다.

4월 16일 배가 뒤집히고, 파란 선수만 남은 그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안에서 생사의 사투를 벌이던 사람들, 자신을 내놓고 학생들을 구하려던 선생님들, ‘엄마,아빠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남긴 학생들, 제주의 풍경을 보러 올랐다가 하늘나라 여행을 떠나게 된 일반인 희생자들, 세월호 안에서 끝까지 승객을 구하려던 직원들까지...

그날 필자는 돌이 갓 된 아이를 업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도록 눈물이 흐르는데 아이를 보고 울 수 없어 종일 아이를 업고 구조 뉴스를 기다렸다. 그 중에도 꼭 아이를 안고, 토닥이며 바라보며 웃어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조차 너무 미안했다. 하물며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마음은 어떨까. 매년 4월이 되면, 벚꽃이 그렇게도 슬프다는 세월호 유가족들이다. 

이제는 조금 웃어도 된다고 말해도 될까. 그 슬픔의 무게, 진상규명의 과제, 망각과의 싸움, 그 모든 삶의 숫자들 조금이라도 우리가 나눠 가질 테니 말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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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시민 2018-04-20 09:39:23
학생들을 구하다 돌아가신 의로운 선생님의 순직이 인정되어 다행입니다.
급박한 사고 순간에 자신의 목숨 챙기기에도 부족한 상황에서 학생들부터 챙기셨으니 진정한 선생님이십니다.
좋은 곳에서 평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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