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D. 2018.6.21 목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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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도공, 흙과 불을 다루는 천년의 예술가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굿모닝충청 교육사랑신문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8년도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역신문활용교육의 일환으로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을 총 1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직업과 생애를 통해 오늘을 사는 학생·청소년들의 꿈과 끼를 키우고, 진로와 직업의 세계를 풍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두 번째 주제는 ‘도공(陶工)’입니다. 도자공예는 당대의 미학과 민족성을 반영하고, 흙과 불을 다루는 고도의 기술과 문화가 함축된 예술입니다. 우리 역사 속 도공들은 어떤 인물들이었을지, 그들의 파란만장하고, 찬란한 이야기를 학생기자들과 나눠보고자 합니다.<편집자 주>
    도공의 손(경기도 광주시 제공)

    [굿모닝충청 권성하 기자]  도공의 사전적 의미는 ‘옹기장이’다. 옹기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한국에서 도공은 오랜기간 동안 존경받는 직군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 고려 후기 직업에 따른 사회계급이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구분되면서 귀천 역시 선비·농민·공장(工匠)·상인 등의 순으로 굳어졌다. 중국에서 건너온 유교적 신분 질서였다. 이러한 신분차별은 수백 년 동안 계속됐고,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이후에야 철옹성 같던 질서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도공에 대한 세계의 시각은 달랐다. 같은 시대 바다 반대편 영국의 시인이자 예술비평가인 허버트 리드(Herbert Read·1893~1968)는 “도자(陶磁) 만큼 한 나라의 문화와 기술의 척도를 제공해 주는 예술 장르는 없다”고 했다. 동양문화에 대한 찬사와 감동이 아니더라도 산업적인 가치를 간파한 일갈이다.

    굳이 멀리 바라볼 필요도 없다.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일찌감치 도공의 가치에 눈을 떴다. ‘임진왜란’이 증거다. 흔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불리는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의 조일전쟁을 세계 전쟁사에서는 ‘도자기 전쟁’이라고 말한다. 선진 문물을 약탈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17세기 초까지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세계에서 조선과 중국 두 나라만 가진 첨단 기술이었다.

    조선 백자의 상품 가치에 눈독을 들이던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고, 군대 안에 공예부를 조직해 도공은 물론 집집마다 흔했던 요강이나 개밥그릇까지 쓸어 갔다. 유사 이래 문화와 경제에서 일본을 압도했던 조선은 도자기 제조의 원천 기술을 일본에 유출시키면서 경제력이 역전됐다. 임진왜란을 ‘도자 전쟁(燒物戰爭·야키모노 센소)’으로 부르는 까닭이다.

    경기도 광주의 무명 도공의 비. 출처=답사여행의 길잡이 7

    역설적이지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은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의 지원 아래 마음껏 예술성을 펼친다. 다이묘들은 “성 하나와 조선 찻잔과 바꾼다”고 할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아끼지 않았다. 기술을 천시하던 조선에서 천대 받던 조선 도공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도자기를 빚으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큐슈지역을 중심으로 저마다의 혼을 담은 자기를 빚었고, 어느새 일본은 사가현의 나베시마에서 가라츠야키(唐津燒)와 이마리야키(伊万里燒)를, 오이타현과 후쿠오카현에서 각각 다카토리야키(高取燒)와 아가노야키(上野燒)를, 가고시마현의 시마즈에서는 사츠마야키(薩摩燒)를, 나가사키현의 오오무라와 마츠우라에서는 각각 하사미야키(波佐見燒)과 나카노야키(中野燒)를, 야마구치현의 모우리에서는 하기야키(萩燒) 등의 브랜드를 만들어 낸다. 야끼(燒)는 ‘가마’를 뜻한다.

    이 때 일본 도자사에 혁명적인 과업을 이룩한 이삼평(李參平)이란 조선인이 등장한다. 바로 일본 자기의 출발점을 알리는 ‘아리타야끼(有田燒)’다. 일본에서 도조(陶祖·도자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이삼평은 사가현 아리타에서 백자가 되는 원료를 발견해 처음으로 ‘Made in Japan’ 백자를 완성했다. 거친 도기에서 표면이 매끈한 자기로의 발전은 획기적인 대사건이었다. 이삼평에 의해 막을 연 일본 자기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고,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다. 임진왜란 이후 에도(江戶)시대 1653년부터 100년 동안 나가사키항을 통해 서양에 수출된 아리타 도자기는 100만점을 넘었다.

    어느새 일본은 세계 무대에서 ‘도자기의 나라’가 됐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전까지 거둔 해외 무역이익의 90%가 도자기로 번 돈이었다. 메이지 유신과 일제강점기를 낳은 종잣돈이 도자기 수출에서 나온 셈이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이삼평이 나고 자란 곳은 충남 공주다. 지난 1990년 한일 양국의 우호 친선을 바라는 일본 사가현의 아리타쵸 주민들이 모금을 통해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 산33-1번지에 도조 이삼평공 기념비를 세웠다. 현재는 공주시 학봉리 이삼평공원에 비석이 옮겨졌다. 일본 아리타의 도산(陶山)신사는 일왕과 다이묘와 함께 이삼평을 모시고 추앙하고 있다.

    일본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도공 일가를 이룬 이는 이삼평 뿐만이 아니다. 수백 명의 도공을 이끌었던 여성 도공 백파선(百婆仙)도 있고, 지금도 유명한 오이타의 다카토리(高取) 도자기를 만든 팔산(八山), 구마모토의 고다(高田) 도자기와 후쿠오카의 아가노(上野) 도자기를 창시한 존해(尊楷) 등도 일본에서 이름을 날린 조선 도공이다.

    일본 아리타 석장신사에 있는 이삼평 조각상(왼쪽)과 이삼평의 영혼을 모신 도산신사의 도조 이삼평 비

    앞서 언급한 가고시마현의 사츠마야키(薩摩燒)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번주였던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심당길과 80여명의 조선인들이 만든 가마터다. 1603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식 가마를 짓고, 조선 분청도자기를 본뜬 흑색도자기 '구로몬'을 탄생시켰다. 12대손인 심수관이 국제품평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심수관 가문은 지난 1998년 1대 도공이 일본에 끌려간 지 400년 되는 해를 기념해 전북 남원에서 ‘심수관 400년 귀향제’를 열었다. 이때 이들은 ‘남원의 불(火)’을 가지고 가고시마로 돌아갔다. 무슨 의미일까? 이에 대해 심수관 가문은 “초대 심당길 일행이 일본에 끌려올 때 가지고 온 것은 흙과 유약 기술이었다. 그들이 만든 도자기는 불(火)만 일본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히바카리(火計り·오로지 불만 빌렸을 뿐이라는 의미)라고 부른다. 하지만 4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거꾸로 일본의 흙과 유약과 일본 기술에 한국의 불로 도자기를 구워보자고 해서 한국의 불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에는 ‘무명 도공의 비’가 서 있다. 지난 1977년 도공들의 높은 도예의 경지를 기리고,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비다. 평생 흙으로 그릇을 빚고, 깊은 산의 나무로 가마에 불을 지폈던 이름 모를 도공들. 도자기에 혼과 넋을 불어 넣었을 뿐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았던 위대한 예술가들을 위해 비문의 글을 옮긴다.

    “후손들에게 뛰어난 문화유산을 남겨주고, 온 곳으로 돌아간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넋들이여. 흠모하나니 위로받을 지어다.”


    권성하 기자  nis-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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