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위대한 군인 이야기
역사 속 위대한 군인 이야기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 권성하 기자
  • 승인 2018.07.07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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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교육사랑신문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8년도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역신문활용교육의 일환으로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을 총 1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직업과 생애를 통해 오늘을 사는 학생·청소년들의 꿈과 끼를 키우고, 진로와 직업의 세계를 풍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다섯 번째 주제는 ‘군인(軍人)’입니다. 군인은 국가의 안전보장을 수호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고, 전시에는 직접 전투에 나서는 사람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는 어떤 위대한 군인이 있었을까요? 또 군 편제는 어떻게 발달했을까요? 학생기자들과 함께 살펴봤습니다. <편집자 주>
도마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쓴 유묵은 참군인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금언이다.

[굿모닝충청 권성하 기자]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군인의 정신과 사명감을 요약한 문장이다. 구한말 일제의 을사늑약에 항거하기 위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사살한 안중근 의사(1879∼1910)가 남긴 유묵(遺墨)이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군인의 본분이다. 군인은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해 모두가 각기 투철한 사명감과 건전한 정신으로 무장돼 있을 때 비로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우리 역사 속에는 위대한 군인이 많다. 역사서의 편찬과 집필이 인물 중심(列傳)으로 서술되다 보니 ‘영웅=군인’의 스토리는 모든 나라의 공통점이다. 때론 알렉산더대왕이나 칭기즈칸, 광개토대왕이나 근초고왕처럼 왕이 군인이고, 영웅인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역사 속 영웅스토리는 군인을 중심으로 쓰고 읽혔다.

바람 앞 촛불 같은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해낸 군인의 이야기는 고금을 막론하고 가슴을 울린다. 외세의 침략이 잦았던 우리 역사는 수많은 구국의 영웅들을 기억하고 있다.

외교 담판으로 고려의 국경을 지켜내고, 잃었던 옛 영토까지 되찾은 서희의 업적은 21세기 국가 안보를 책임져야 할 군인과 전략가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된다.(사진출처=이천시역사박물관)
12세기초 북방의 여진족을 물리친 윤관 장군의 업적을 그린 척경입비도.(사진출처=고려대박물관)

고구려 영양왕 23년(612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터진 수(隋)나라와의 전쟁은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을 낳았다. 살수대첩의 지휘관 을지문덕(乙支文德)이다. 수나라의 113만 대군을 앞에 두고도 전혀 겁내지 않았고, 힘만으로 무찌를 수 없음을 알아 온갖 작전을 동원했다. 나아갈 뿐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연한 기상을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을지문덕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신채호 선생은 책 ‘을지문덕’에서 “을지문덕주의는 적이 커도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고, 적이 강해도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며, 적이 사납든지 용맹하든지 간에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 식은땀으로 등이 젖고, 털끝만큼이라도 양보하면 입으로 피를 토하면서 이로써 자신을 독려하고, 이로써 동료를 고무하며, 이로써 전국 국민을 흥기 시켜, 그 삶을 조선으로서 하며 그 한 번 숨 쉬고 한 번 먹는 것을 반드시 조선으로서 한 결과, 마침내 여진 부락을 다 우리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중국의 천자를 우리 손으로 거의 사로잡을 뻔했던 것이다”라고 썼다.

을지문덕은 생몰연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열전의 두번째 주인공으로 을지문덕을 올렸다. 첫번째 인물은 김유신이다. 그만큼 존경받는 군인이었다는 의미다.
아시아의 패권국가인 중국과 맞선 고구려 군인은 또 있다. 바로 양만춘(楊萬春) 장군이다. 정사에는 이름이 전하지 않고, 안시성(安市城) 성주로만 기록돼 있다. 다만 송준길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에 이름이 전해진다. 645년(보장왕 4년)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해 개모성(蓋牟城)·요동성(遼東城)·백암성(白巖城)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고구려·말갈 연합군대 15만을 궤멸하고 안시성을 공격했을 때 민·관·군을 통솔해 당나라 군대의 총공세를 물리치고 고구려를 지켜냈다.

중국측 역사에는 안시성에서 패한 당나라 군대가 이후 20일 동안 퇴각하는데 바람과 눈이 휘몰아쳐 군사들의 옷이 젖고, 폭풍과 눈, 엄청난 추위에 얼어죽은 군사가 부지기수였으며 소와 말 70% 이상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당 태종이 패전의 수치를 감추려고, 자신들의 전과를 부풀리고 피해는 최소화했다고 비판했다. 퇴각할 때 고구려군의 후미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추위를 핑계 댔다는 것이다. 또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한 고구려는 베이징 등 중국 내륙까지 당 태종을 추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만큼 안시성전투와 양만춘의 전과는 어마어마했다.

구국의 영웅, 어떤 수식도 이순신 장군의 위업에는 모자람이 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마음가짐은 군인정신의 표상이다.
'사나이가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매헌 윤봉길 의사의 불타올랐던 독립 의지는 한국은 물론 바다 건너 중국 대륙의 항일투쟁을 이끌어 냈다.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늘 한반도에 긴장감을 줬다. 5대 10국 시대를 지나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와 북방 초원지대를 지배한 거란족의 요나라의 충돌은 고려에도 영향을 미쳤다. 요나라는 993년과 1010년, 1018년 등 3차례나 고려를 침공한다. 1차 침공에는 소손녕의 80만 대군이 고려의 국경을 넘었고, 유명한 서희(徐熙) 장군(942~998)의 외교 담판이 진행된다. 서희는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소손녕의 주장에 나라 이름만 봐도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라고 반박했고, 오히려 압록강 하류 강동6주를 되찾는 쾌거를 거둔다.

1010년 거란은 다시 40만 대군을 끌고 침공했지만 개경에서 하공진 장군의 거짓 항복을 받아내고 돌아가던 중 귀주에서 양규 장군에게 패했고, 다시 1018년 소배압이 10만 군사를 끌고 3차 침공에 나서지만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으로 긴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다.

고려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함경도 지역에서 무공을 세운 인물의 행적을 엮은 그림책이 있다. 바로 ‘북관유적도첩’이다. 여기에는 12세기 초 여진족에 맞서 싸운 윤관(尹瓘) 장군의 일화를 그린 ‘척경입비도’가 수록돼 있다. ‘척경입비도’는 고려 예종 2년(1107년) 윤관이 지금의 함경도 일대에서 여진족을 정벌한 뒤 길주와 공험진 등 9성을 개척하고, 선춘령에 ‘고려지경’이라고 새긴 비를 세워 경계를 삼은 일을 그린 것이다. 윤관은 여진 정벌을 위해 기병(신기군), 보병(신보군), 승병(항마군)으로 구성된 특수전투부대 ‘별무반’을 조직해 여진족을 소탕하고, 동북 9성을 쌓았다.

조선시대 군인의 표상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다. 23전 23승의 무패 신화, 한산도대첩, 학익진, 백의종군. 그는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뒤 궤멸된 수군을 추스려 단 13척으로 왜선 133척(징비록 200척·이충무공전서 333척)과 맞서 31척을 격파한다. 정유재란의 판도를 뒤집은 ‘명량해전’이다. 전투 하루 전에 쓴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라는 글에 그의 마음이 담겨있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란의 가장 중심에 있던 그의 생애는 전쟁과 동시에 끝났다.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왜란도 종결됐다. 구국의 명장을 국가에서 추숭한 것은 당연했다. ‘성웅’이라는 수식어가 마땅했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오. 대한독립의 함성이 천국까지 들려오면 나는 기꺼이 춤을 추면서 만세를 부를 것이오.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는 것이며 동양의 평화를 위해 죽는 것인데 어찌 죽음이 유감스럽겠는가! 때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때를 만나는가? 북쪽바람이 차기도 하나 내 피는 뜨겁구나. 우리 동포 형제 자매들아. 이 공업(功業)을 절대 잊지 말라.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 안중근 의사의 피맺힌 절규는 수많은 독립군의 애국심을 대변한다.

우리 역사 속 위대한 군인들. 왼쪽부터 을지문덕, 강감찬, 윤관 장군 초상.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의 마음가짐도 군인의 자세다. 1930년, 매헌 윤봉길 의사가 마지막으로 부인에게 남긴 말이다. 윤 의사는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에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이라고 썼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커우공원에서 일왕의 생일과 전승기념일을 맞이한 자리에서 역사적인 의거를 단행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총재였던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청년 한 명이 해냈다”고 극찬했고, 상해 임시정부 활동에 불꽃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윤봉길은 그해 12월 19일 일본 9사단 공병 작업장 야산에서 총살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살에 불과했다.

이밖에 김좌진 장군(북로군정서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대한독립군 총사령군), 지청천장군(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이범석장군(대한민국 임시정부 참모장), 김영옥 대령(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16인 선정), 김만술 대위(한국전쟁 서부전선 베티고지 영웅) 등도 역사 속 위대한 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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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병장 2018-08-06 19:59:50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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