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조선왕조실록 ‘단골’ 등장 조선 최고의 사상가
[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조선왕조실록 ‘단골’ 등장 조선 최고의 사상가
(17) 대전의 인물-송시열(宋時烈)
  • 자료협조=대전평생교육진흥원
  • 승인 2018.07.1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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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ㆍ생몰연대 : 1607년(선조40)∼1689년(숙종15)
ㆍ거    주 : 대전시 동구 소제동
ㆍ사    적 : 우암사적공원 (대전시 동구 충정로 53)

대전(大田)과 우암 송시열

①호서학파
조선 시대 충청도 지역은 한양과 가까워 당시 힘 있는 양반들이 많이 살았다.
대전 지역 역시 박팽년, 송준길, 송시열 등 이름 높은 선비들의 터전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선비들을 호서사림이라고 부른다. 조선 중기 이후 이름난 사림세력의 본거지가 된 대전은 조선 후기의 학문과 정치를 이끌며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주로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로부터 학문을 이어받은 사계 김장생과 그의 제자들이 학문을 주도해 갔다.

호서사림은 인조 반정 이후 나라의 부름을 받아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김장생(연산), 강학년(회덕, 연기) 등이 임금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나간 것을 시작으로, 김집(연산), 송준길(회덕), 송시열(회덕), 권시(공주), 이유태(금산, 공주) 등이 산림으로 부름을 받아 크게 활약하면서 정치적 세력을 키웠다. 이들은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이이, 성혼, 송익필 등 기호학파의 학문적 바탕은 김장생에게 이어졌으며, 호서에 자리를 옮기면서 그 특성이 한층 더 깊어졌다.

②산림
조선 후기에는 산림이라 불리는 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림 중에서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가던 학문과 덕이 높은 학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산림은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특별한 대우를 받은 조선 후기의 특별한 존재였다.

산림이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것은 그들의 학문적 수준이 매우 높고, 예학에 관한 지식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는 점과 지방 사림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충청도 양반”의 의미 되살리기

계룡산을 동·서로 하여 지금 논산에 속하는 연산면, 은진면, 노성면과 회덕현(대전 송 촌동 일대)은 조선 후기 충청도 양반의 본거지였다.
이곳에서 김장생으로부터 양성된 송준길, 송시열, 윤선거, 이유태, 김경여, 윤증, 권시, 권이진 등은 서로 인척관계를 맺으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계를 이끌어 간 실세들이었고 그들을 일컬어 ‘충청도 양반’이라 하였던 것이다.
이제 400년이 흘렀고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충청도 양반’이 란 말은 때로는 예의바르고 성실하다는 뜻으로, 때로는 고지식하고 느리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대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충청도 양반’이란 오래된 말속에서 무엇 을 찾아내고 무엇을 만들어 내야 하는지 고민해 볼 문제이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인조 때부터이다. 인조반정 이후 권력을 잡은 서인들은 당시 사림 중에서도 명망이 높은 김장생, 장현광 등을 중앙으로 초빙하여 관직을 주고, 그들을 중심으로 단결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공주, 회덕, 연산 등에서 활동하던 호서학파의 산림들이 나라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나아갔다. 대전에서 활동한 송준길, 송시열, 권시 등이 출사한 것도 이 무렵이다.

산림들은 주로 지방에서 선비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면서 지방 선비들의 의견을 중앙에 전달하기도 하고, 중앙의 정치가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면 비판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등 정계와 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송자대전판(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송자대전판은 조선 후기의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의 문집과 연보 등을 모아 만든 『송 자대전』의 목판이다. 송자대전목판은 순조 19년(1819)에 장판각을 지어 보관하였으나 1907년에 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어 1929년 우암의 후손과 유림들이 다시 간행하 였다. 현재 우암사적공원 내 장판각에 보존되어 있다.
우암유물관 우암사적공원 내에 위치한 우암유물관에는 효종이 우암에게 북벌을 당부하며 하사했 다는 담비털옷을 비롯해 유품과 장서, 영정, 그가 직접 소장하고 즐겨보았던 서책 등 그 당시 역사적 배경을 살필 수 있는 것들이 전시되어 있어, 선생의 흔적을 쫓아 사적공원을 찾은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③충청도 양반
김장생이 양성한 김집, 송준길, 송시열, 윤선거, 이유태 등은 인조반정과 관계된 직·간접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인조~숙종 때까지 중앙정계와 학계를 좌우하는 충청도 지식인이 된다. 이를 통해 서인의 주도권이 서울에서 충청도로 오게 되었고, 이들을 ‘충청도 양반’이라 부르게 되었다.

붕당정치기에 서인(노론)을 이끈 송준길·송시열은 회덕현(현 대전 송촌동, 소제동 일대)에 살았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로 효종의 스승이었다. 900여명의 제자 중 당상관 이상이 54명이나 되는 것을 통해서도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생애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성리학자로 정치계와 사상계를 지배했던 인물이다.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명현 38명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 학자 중 ‘자(子)’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1607년(선조40) 11월 충북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용방리(龍防里) 구룡촌(九龍村) 외가(外家)에서 은진송씨 송갑조(宋甲祚)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우암(尤菴)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송시열의 가문은 대대로 충남 회덕이 세거지였다. 그의 9대조인 송명의(宋明誼)가 회덕으로 장가들어 이곳에 살면서부터 후손들은 회덕 백달촌에 송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로 인해 이 지역을 송촌(宋村, 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이라 불렀다. 우암의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임진왜란 때 순국한 의병장 자방(自防)의 딸이다. 그의 어머니는 밝은 달과 같은 구슬을 삼키는 태몽을 꾸었고 그를 잉태하였다.

송시열은 여덟 살(1614년, 광해군6)때 회덕으로 갔다. 이때부터 친척인 송이창에게 글을 배웠는데, 한 살 위인 송준길과 함께 동문수학하며 이후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25세 때 송준길과 더불어 연산에 은거하는 당대의 거유(巨儒)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스승인 김장생의 가르침을 받아 이이의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1631년 스승이 돌아가신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생원시(生員試)”1등 송시열

우암 나이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시험의 문제는 「일음일양(一 陰一陽)을 도(道)라 한다」라는 철학적 문제였다. 그는 태극음양의 이치와 천지조화의 근원을 논한 문답식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때 시험관인 대제학 최명길은 무릎을 치며 “일찍이 드 물게 보던 큰 선비가 생겼으니 이제 중국의 도학은 우리 동방으로 왔다.”하고 극구 칭찬 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송시열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1633년(인조11) 생원시에서 1등으로 합격한 그는, 그해 10월에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의 벼슬을 받았으나 나이 많은 어머니를 떠나 먼 곳에 머무를 수 없다고 하며 사직하였고, 2년 뒤 29세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으나 약 1년 후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중단되었다. 이후 그가 크게 출세하게 되는데 이때 맺어진 인연 때문이다. 병자호란에는 임금님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1637년 인조가 청과 굴욕적인 화의를 맺자 우암은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후에 용담현령·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649년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송시열은 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 이완(李浣)과 함께 효종 북벌계획에 적극 참여하였다. 시무책인「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북벌론의 합당함을 제시하고 북벌이야말로 국가대의라는 것을 표방하였다. 그는 북벌을 위한 많은 개혁을 제시하였고 그 실천에 앞장섰다. 그러나 귀양간 김자겸의 아들 김식이 북벌계획을 청에 밀고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청은 군사를 동원하여 국경을 압박하고 특사를 보내 협박하였다. 이로써 북벌은 잠시 중단되고 송시열도 책임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57년에 찬선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대신「정유봉사」를 올렸다. 1658년(효종9) 7월 다시 찬선을 제수 받았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약 8개월간은 효종을 도와 북벌 계획을 추진하였다.

1659년(효종10) 봄 효종의 병이 위독하여 당시의 영의정인 정태화(鄭太和)와 더불어 우암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려는 눈치였으나 두 사람이 병상에 들어가니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효종의 장례 때 대왕대비인 조대비의 복상(服喪) 문제가 제기되고 후에 이를 빌미로 말썽이 일어나자 그는 벼슬을 사임하고 회덕으로 돌아왔다.

윤선도 등의 공격을 받은 것도 그 직후였다. 이후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1668년(현종9) 우의정으로 취임, 좌의정 허적(許積)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하였다가 다시 우의정으로 복직, 이어서 1673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바로 사직하였다. 1674년(현종15·숙종 즉위년)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인 갑인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9년(숙종5) 거제(巨濟)에 이배(移配)되었고, 이듬해 청풍(淸風)으로 이송되었다.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우암은 유배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다시 등용되었다가 1683년(숙종9)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가 논의될 때 과격한 방법으로 숙청을 꾀하던 김석주(金錫胄)의 태도를 옹호하여 소장파의 비난을 받던 중 그의 제자인 윤증(尹拯)과의 감정 대립이 악화되었다.

마침내 윤증 등 서인의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분파되었다.

그 후 우암은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 은거하면서 회덕과 화양 등지에서 후학의 양성에 전념하다가 1689년(숙종15) 그의 나이 83세 때 희빈 장씨의 아들이 왕세자(후일 경종)로 책봉되자 이는 시기상조라고 하는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왕의 신문을 받기 위해 압송되던 도중에 남인의 책동으로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 후 1694년(숙종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에 대한 무죄가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1726년(숙종42)의 병신처분과 1744년(영조20)의 문묘배향으로 송시열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을 얻게 되었고, 영조·정조대에 노론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었기에 우암의 위상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괴산 화양계곡 암서재(巖棲齋)

사상
송시열은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적통이다. 그의 철학사상은 조광조의 지치주의, 이이의 변통론, 김장생의 예학 등 기호학파의 학문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암의 이러한 사상적 경향과 학문적 성과는 이후 조선사회의 정치·사회·사상을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체계가 되었다.

그는 주자와 기호학파의 기본 노선을 철저히 계승하였고 실천주의자로서 ‘직(直)’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런 까닭에 형이상학적 학설 논쟁에만 몰두하지는 않았다.

그의 성리학은 주자의 사상을 기본으로 한 위에 율곡 이이의 설을 계승·발전시켰다. 그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중시하여 정치가는 자신을 수양한 후에 치국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시열은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저서로는 문집 100여권과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어류소분(語類小分)’, ‘논맹혹문통고(論孟或問通攷)’, ‘계녀서’ 외 여러 저서들이 있다. 문집으로는 1717년(숙종43) 왕명에 의하여 교서관에서 편집·간행한 철활자본 ‘우암집’이 있으며, 1787년(정조11) 누락된 글들을 수집·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출간한 ‘송자대전’이 있다.

시호는 문정이며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여주의 대로사, 화양동 화양서원, 회덕의 숭현서원, 남간사 등 전국 70여개 서원과 사우에 모셔졌고, 지금도 40여 곳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다. 송시열의 묘소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다. 현재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우암사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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