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글씨, ‘서예’와 이름을 떨친 명필들
조선의 글씨, ‘서예’와 이름을 떨친 명필들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 권성하 기자
  • 승인 2018.07.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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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교육사랑신문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8년도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역신문활용교육의 일환으로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을 총 1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직업과 생애를 통해 오늘을 사는 학생·청소년들의 꿈과 끼를 키우고, 진로와 직업의 세계를 풍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여섯 번째 주제는 ‘서예(書藝)'와 캘리그라피(Calligraphy)입니다. 서예는 붓으로 글씨를 쓰는 예술이고, 캘리그라피는 '손으로 그린 문자'라는 뜻입니다. 우리 역사를 기록한 글씨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리고 한국을 빛낸 서예가는 누가 있을까요? 학생기자들과 함께 살펴봤습니다. <편집자 주>
고구려의 글씨들. 왼쪽부터 광개토대왕비, 충주고구려비, 집안고구려비 탁본.

[굿모닝충청 권성하 기자] 서예는 문자(文字)를 소재로 하는 조형예술이다. 고대 중국에서 발달해 한자를 사용하는 한국과 일본, 베트남 등 여러 나라에서 계승 발전했다.

현재까지 발굴된 금석과 목간 등에 미뤄볼 때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독특한 서체를 이뤄냈다. 중국 서예의 수용과 변용을 거듭하면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서로 유사성과 뚜렷한 차별성을 가지며 발전했다. 저마다 독창성과 정체성을 찾고자 한 동시에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의미다.

책 '삼국시대의 서예'(정현숙·일조각)에 따르면 삼국의 글씨는 각기 다른 역할로 고대 동아시아 문자문화에 금자탑을 세웠다. 세 나라는 석비, 벽돌, 기와, 나무 등 다양한 재료에 문자를 남겼다. 내용도 공적인 것도 있고 사적인 것도 있다. 용도에 따라 재료의 선택을 달리했고, 글씨도 달라졌다.

고구려의 글씨는 용도에 따라 서풍을 달리했는데, 국가적 사건을 기록한 공식적인 비문에는 고구려의 진취적 기상을 드러내는 웅건무밀한 글씨를 썼고, 개인적 용도의 금석문에는 편한 마음으로 자유로운 서체를 구사했다. 이는 삼국 가운데 고구려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며 고구려 서예의 특징이자 정체성이다.

대표적인 고구려 글씨는 ‘광개토대왕비’, ‘집안고구려비’와 ‘충주고구려비’, ‘평양성고성각석’, 신라 수도인 경주에서 출토된 ‘광개토왕호우’, ‘연수원년명은합(서봉총은합)’ 등 5, 6세기 금석문이 있다. 모두 힘차면서 고박한 서풍이며 예서와 행서의 필의가 가미된 필법이다. 이런 서체는 6세기 신라의 글씨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신라의 글씨들. 삼국통일 전인 진흥왕 시절 국경을 돌아보며 세웠다는 4개의 진흥왕순수비인 ‘북한산비’, ‘창녕비’, ‘황초령비’, ‘마운령비’의 탁본과 비석.
백제의 글씨들. 왼쪽부터 무령왕릉지석과 탁본(위아래.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사택지적비 탁본, 부여능산리사지 목간들(이상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미륵사지금제소형판(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소장)

5세기 고구려에 정치적으로 예속됐던 신라는 서예문화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5세기 후반 스스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면서는 신라의 문장과 글씨는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신라 서예의 특징은 한마디로 일관성과 다양성이다. 다양한 석비 형태와 서법의 다채로움은 주어진 환경을 이용하는 신라인의 적응력과 순발력을 알 수 있다. 서체와 서풍의 일관성은 중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리적 환경으로 선진 문물의 영향을 덜 받은 신라인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성품의 표상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서예를 수용했지만 창신(創新)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했고, 이후 중국과의 활발한 교섭을 통해 외래 서풍인 북위풍을 수용하면서 진일보된 모습을 보여줬다. 신라 중기의 글씨는 진흥왕순수비인 ‘북한산비’, ‘창녕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의 금석문과 삼국통일 이후의 문무왕릉비, 김인문묘비, 화엄사석경, 사천왕사비, 대방광불화엄경 등이 있다.

백제는 고구려, 신라에 비해 전아하면서 유려한 서풍이 특징이다. 일찍부터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선진문화를 대거 유입한 탓이다. 백제 서예는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을 중시하면서 서사 재료에 따라 각기 다른 맛의 세련미와 고박미를 동시에 보여 주는 개성적 서예를 창조했다. 물론 최근 출토된 불교 관련 문자 자료들은 기존의 서풍과 대비되는 질박한 분위기를 갖고 있어 백제 서예를 총체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한문 발달 정도도 같은 시기 고구려나 신라보다 앞섰다. 이두(吏讀) 양식을 보인 고구려나 신라의 명문과는 달리 ‘무령왕지석’처럼 중국의 한문 양식을 따랐다. 또 고구려에 없는 행정 문서인 목간이 다량 출토돼 백제의 서예문화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백제의 글씨는 고대 일본의 목간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7세기 일본 아스카 시대의 목간에 쓰인 ‘논어’, ‘천자문’, ‘관세음경’은 목간의 문장 양식이나 글자 형태가 백제와 유사하다. 백제 도왜인이 전한 글씨로 추정되며 일본 목간에 남은 백제 서예의 흔적은 7세기 백제의 개방성과 다양성, 국제성을 보여 주는 증거다. 백제는 자국의 서예문화를 융성시키면서 동시에 일본에 보급하는 매개 역할을 함으로써 동아시아 문자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나라다.

고려시대의 글씨는 흔적비문 ·묘지명 ·사경 등을 제외하면 흔치 않다. 고려 전기는 거의 비석이고 후기는 비 ·묘지명 ·진적과 사경 등이 많다. 고려의 글씨체는 전기에는 해서(楷書)는 구양순의 서풍이고, 행서(行書)는 왕희지풍 일색이다. 후기에는 25대 충렬왕 이후 조맹부의 서체가 들어오면서 크게 유행하고, 조선 전기까지 영향을 끼친다.

고려의 글씨로는 이환추의 ‘광조사 진철대사비’와 ‘보리사 대경대사탑비(보물 361), 장단열의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보물 172), 안민후의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국보 59)’, 이원부의 ‘반야사 원경왕사비’ 등이 손꼽힌다.

고려 후기에 크게 유행한 조맹부체는 제26대 충선왕의 영향이 컸다. 충선왕은 왕위를 물려준 뒤 중국의 연경에서 만권당을 짓고 당시 원나라의 명사들과 교류했다. 특히 조맹부와 친교가 두터웠다.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 문적과 서화를 많이 들여왔고, 조맹부의 서체인 송설체(松雪體)가 조선 초기까지 영향을 줬다.

고려의 글씨들. 왼쪽부터 이환추의 보리사 대경대사탑비(보물 361), 장단열의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보물 172), 안민후의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국보 59).

조선시대 초기는 정부주도로 송설체로 된 증도가(證道歌)·천자문(千字文)·적벽부(赤壁賦) 등이 간행됐다. 이후 세종시대에 왕희지체를 궤범으로 삼게 하면서 두 가지 서체가 주류가 된다.

조선 초기의 명필로는 안평대군을 꼽는다. 당대 최고 화가인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서른살에 발문을 썼는데 늠름하고 품위가 있어 천하제일로 명성을 떨쳤다.

대체로 조선 전기는 조맹부·왕희지 이외에도 명나라 문징명·축윤명의 서풍도 들어와 혼류되어 유행했다. 성종 때의 권벌은 행서와 초서의 대가로 초서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된다.

조선의 글씨는 선조 때의 한석봉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석봉 한호는 왕희지 풍의 진체(晉體)로 해서와 행서, 초서에 능했다. 또 삼대가(三大家)로 불린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 표암 강세황의 글씨가 유명하다. 행서에 능하고 자하체(紫霞體)로 유명한 자하 신위와 한국 최고의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이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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