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 나라의 부(富)를 만든다
상인, 나라의 부(富)를 만든다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 권성하 기자
  • 승인 2018.07.21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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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교육사랑신문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8년도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역신문활용교육의 일환으로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을 총 1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직업과 생애를 통해 오늘을 사는 학생·청소년들의 꿈과 끼를 키우고, 진로와 직업의 세계를 풍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여섯 번째 주제는 상인(商人)입니다. 우리 역사 속 상인의 모습과 상업을 경제의 중심으로 바라본 조선의 중상주의 사상가들을 학생기자들과 함께 살펴봤습니다. <편집자 주>

 

조선은 신분질서가 확고한 사회였다. 조선은 농본사회였고, 이득을 추구하는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을 멸시했다. 하지만 수많은 학자들이 중상주의 국부론을 주창했고, 양반 상인론까지 대두될 만큼 상업과 상인은 나라의 부를 키우는 소중한 시스템이었다.

[굿모닝충청 권성하 기자] ‘상인(商人)’은 장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상인이 등장한다. 각 나라를 오가는 무역상과 시전(市廛) 상인, 보부상(褓負商)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통일신라 때는 객주(客主)가 등장한다.

물론 시장의 형태는 원삼국시대인 삼한시대에도 존재했다. 사회경제가 발전하면서 가로시(街路市), 읍성시(邑城市) 등의 시장이 갖춰져 초기 형태의 상인들이 활동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에서는 좌상(座商)인 시전(市廛) 상인이 경내(京內)에서 어용상인으로 정착했고, 송(宋)·일본·거란(契丹) 등과 활발한 거래를 통해 무역상이 번성했다.

고려의 상인들은 거래상황을 ‘사개치부법(四介治簿法)’이라는 독특한 장부기록법으로 정리했다. 일종의 복식부기 방식으로 서양보다 200여 년 앞선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고려의 상인들은 천민층에 속하여 관리 등용은 물론 교육의 기회도 갖지 못했다. 공부(貢賦) 및 군역(軍役) 의무도 부여되지 않았다.

상인의 신분적 지위는 조선시대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중앙의 육의전과 일반 좌상이 관청에 소속된 아전 서리와 비등한 존재로 취급됐을 뿐이다.

박제가는 네 번에 걸친 청나라행을 통해 그곳의 풍속과 제도를 책 ‘북학의’에 기술했다. 그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한 뒤 조선의 상공업과 농업, 기구와 시설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론을 주장했고, 후대의 북학파로 이어졌다.

상인의 신분적 지위가 개선되지 않았던 것은 중국제도의 영향이 컸다. 농업을 근본으로 삼는 사회에서 이득추구를 지향하는 상업은 억제되고 죄악으로 치부됐다. 이같은 현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풍조다.

때문에 조선 중기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펼쳐진 중상주의(重商主義) 사상가들의 등장은 놀라운 일이다.

18세기 실학자들의 경제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토지개혁 문제를 중심으로 경제사상을 펼친 ‘중농주의 학파’와 상공업 발전 전략을 중심으로 경제사상을 전개한 ‘중상주의 학파’다. 중농주의 학파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을 들 수 있고, 중상주의 학파는 유수원, 박지원, 박제가를 꼽는다. 박제가(1750~1805)의 저서 ‘북학의(北學議)’는 조선의 부국강병을 상공업 발전과 상업적 농업경영이라는 중상주의 경제사상에서 찾아낸 역작이다.

유수원은 책 '우서'를 통해 18세기 조선 사회의 최대 문제점으로 민산(民産)의 부족을 꼽았고, 대부분의 농민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사민일치(四民一致)', 즉 신분제 질서를 파기해 평등세상을 이루는 것을 일차적인 과제로 제시했다.

박제가는 조선이 가난한 것은 무역이 부진한 탓이라 여겼다. 우물물처럼 긷지 않으면 솟아나지 않듯이 부의 원천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누구나 중시했던 검소와 절약 관념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는 수레를 널리 이용하여 국내 상업을 발전시키고 동시에 견고한 선박을 만들어 해외 여러 나라와의 무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산력과 상품 유통의 발전, 통상무역은 박제가가 제시한 경제관의 핵심 골자였다.

사실 조선에 중상주의의 씨앗을 뿌린 이는 유수원(1694~1755)이다. 유수원은 영조시대 당쟁과 신체적 장애 속에서도 학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인물이다. 그의 책 ‘우서(迂書)’는 북학(北學) 사상의 원류로 평가된다.

그는 ‘우서’를 통해 무위도식하면서 문벌에 끼려고 애쓰는 양반들을 전업시켜 농업과 공업, 상업에 종사하게 하고, 사·농·공·상을 평등한 직업으로 만들어 전문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형됐고, 노론의 집권이 한말에 이르도록 계속되면서 그의 글과 사상은 널리 퍼지지 못했다.

유수원의 문명(文名)과 학문·사상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1960년대다. 저자를 알지 못했던 ‘우서’가 유수원의 저술임이 밝혀지면서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의 선구적 인물로서, 또 상공업 중심의 부국안민론(富國安民論)을 주창한 대표적 인물로 자리하게 됐다.

조선 최고의 시장주의자로 정조대왕 시절 정승을 지낸 채제공(1720∼1799)을 빼놓고 논할 수 없다.

채제공과 이지함은 조선의 중상주의를 이끈 시장경제학자들이다. 이지함의 본말상보론과 채제공의 신해통공은 상업으로 조선의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몸부림이다.

1791년(정조 15년) 한양의 중심가와 4대문에 조선의 상업 및 시장사에 한 획을 긋는 발표문이 내걸린다. “시전상인들이 사상인(私商人·개인 상인)의 상업 활동을 단속하고, 금지할 수 있도록 허용한 금난전권에 대해 육의전을 제외하고 모두 혁파한다.” 바로 채제공이 주도한 ‘신해통공(辛亥通共)’의 서막이다.

신해통공의 가치는 간단하다. 시전상인들이 휘둘렀던 금난전권은 당시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도시민 증가로 생겨난 상품 매매 및 유통에 대한 거대한 욕구를 억압하고, 시장경제 발전을 흐리는 해악을 가져왔다. 채제공은 상업 활동의 자유 및 시장경제의 발달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민생을 해치는 ‘사회악’인 금난전권을 폐지함으로써 경제 개혁을 실현하고자 했다.

신해통공의 의미는 1894년 갑인통공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다. 이러한 조치는 이후 조선의 상품 유통과 화폐경제 발달에 거대한 분수령이 됐고, 상업과 시장 권력이 시전상인에서 사상인 계층으로 대거 이동하는 일대 전기가 된다.

재미난 사실은 영·정조 시대에 꽃피운 중상주의 실학자들보다 한참 앞선 조선 최초의 사대부 출신 대상인(大商人)이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토정 이지함(1522~1578년)이다.

목은 이색의 7대손인 이지함은 임진왜란 이전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경세 사상가이자 율곡 이이(1536~1584년)의 사상적 동지였다. 율곡이 34세 때 지은 ‘시무구사(時務九事)’를 시작으로 ‘동호문답(東湖問答·34세)’, ‘만언봉사(萬言封事·39세)’, ‘걸변통폐법답(乞變通弊法答·46세)’ ‘만언소(萬言疏·47세)’, 마지막 상소(48세)까지 15년에 걸쳐 조선의 정치·경제·국방의 전면적 개혁을 주창했다면 이지함은 ‘상공업을 발전시켜 농업을 보완해야 한다’는 본말상보론(本末相補論)과 ‘자원경영, 인재경영, 공동체경영의 세 가지 정책으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3대부고론(三大府庫論)으로 율곡에 화답하는 경세지학을 세상에 던져 보였다.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에는 이지함의 일화가 수록돼 있다. ‘스스로 상인이 되어 백성을 가르치고, 생업에 힘써 몇 년 만에 수 만석에 이르는 곡식을 얻었는데 모두 백성에게 나눠주고 홀연히 떠났다’거나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었는데 열매가 수만 개나 됐다. 바가지를 만들어 팔고, 곡식을 샀는데 1000석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 ‘굶주린 백성을 위해 큰 움막을 짓고, 수공업을 가르쳤다. 가장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짚신을 삼도록 했는데 하루 열 켤레를 만들면 시장에 내다 팔았다. 하루의 작업으로 쌀 한 말을 마련했고, 두어달 만에 사람들의 의식(衣食)이 모두 넉넉해졌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직접 상인이 되어 막대한 재물을 축적하는 상술을 통해 백성의 곤궁함을 덜어주고자 했던 이지함은 200년 뒤 유수원과 박제가가 제시한 ‘양반 상인론’의 롤모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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