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영호의 인문학 서재] 라디오의 잡음은 인간을 파괴한다
    [임영호의 인문학 서재] 라디오의 잡음은 인간을 파괴한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 임영호 우송정보대 특임교수
    • 승인 2018.07.28 13: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굿모닝충청 임영호 우송정보대 특임교수] 괴테는 그의 일기에서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고 말했다. 침묵이? 말하는 것만 생각했지 고요한 정적 같은 침묵은 생각조차 안한다. 왠지 손해 보는 느낌, 자기방어나 자기홍보조차 포기하여 자신을 세상의 저잣거리에 방치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침묵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경쟁과 과잉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요란한 소리를 내고 행동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고 확인받으려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일상적이지 않은 침묵에 대하여 고뇌하면서 무서울 정도로 말하는 이는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스위스 태생 의사로 철학자이고 작가인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는 ‘침묵의 세계’에서 침묵에 대하여 아주 강력하게 경외심으로 일관되게 말한다. 한마디로 침묵은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그 무엇이다. 침묵이란 그저 인간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말의 포기 그 이상의 것이다. 침묵은 가치 있는 존재로 하나의 독자적인 현상이다. 아주 강력한 언어로 형이상학이다. 소설가 신경숙 님도 이 책을 통하여 세상의 만물이 침묵을 바탕 삼아 수많은 것들을 흡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말이다. 그런데 말은 주변의 사물과 생각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말이 침묵과 관련성을 잃으면 위축되고 만다. 말과 침묵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말이 진리가 없다면 말은 침묵위에 드리워진 하나의 불분명한 중얼거림으로 전락한다. 진리의 말을 위해서는 침묵과 연관이 있어야한다. 말의 이면이 침묵인 것처럼, 말은 침묵으로부터 생겨난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자리에는 언제나 침묵이 귀 기우리고 있다. 제3의 화자는 침묵이다. 결국 인간을  둘러싼 저 밑 근원에 침묵이 존재한다.

    침묵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천 가지 형상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소리 없이 열리는 아침 속에서, 소리 없이 하늘로 뻗어있는 나무들 속에서, 말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침묵은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고 말을 통하여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된다. 말에게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도 없다.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反響)이다. 음악의 소리도 침묵 위를 흘러가듯이 침묵에 떠밀려 나온 것이다. 침묵의 표면을 뚫고나온 용암덩어리와 같다.

    막스 피카르트는 이 책에서 침묵과 사랑, 침묵과 신앙, 침묵과 시의 관계, 인간의 얼굴, 침묵과 라디오과 같은 주제에 대하여 말한다. 사랑 속에는 말보다는 오히려 침묵이 더 많다. 다른 현상들은 모두가 침묵으로 먹고 살며 침묵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는다. 그런데 사랑만은 침묵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연인에게 말할 때 그의 말보다는 침묵에 귀 기울인다. 사랑에는 말보다는 침묵이 더 많다.

    침묵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은 하나를 이루고 있다. 침묵 속에서 인간과 신의 신비가 서로 만난다. 인간은 신의 신비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도 하나의 침묵의 층을 마련해야 한다. 침묵으로부터 신의 신비의 경이로움을 얻고 거기서 힘을 얻는다. 신에게는 말과 침묵이 하나이다. 말이 인간의 본질이 되듯이 침묵은 신의 본질이 된다. 기도란 애초부터 침묵의 영역 안에 있었다. 기도는 인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신에게 받아들여진다. 기도는 인간의 침묵을 신의 침묵에로 인도하는 것이다. 소란스러운 방법으로 신에게 외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의 말씀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

    시는 침묵으로부터 나온다. 시는 한 침묵에서 다른 침묵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위대한 시란 침묵 속에 박아 넣은 모자이크다. 위대한 시인은 그 대상에게 다른 시인이 한마디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다. 그것을 전적으로 혼자 차지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에는 시인에게 소음의 세계를 표현하라고까지 한다. 여기서 치유와 구원은 되지 않는다.

    인간 얼굴은 침묵과 말 사이의 마지막 경계선이다. 인간의 얼굴은 말이 튀어나오는 벽이다. 침묵은 얼굴 속 어디에나 있으나 얼굴에는 체험들이 지나치게 뚜렷이 새겨져있다. 너무도 강렬하게 존재하면서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얼굴에 침묵이 사라져 가고 있다. 모든 말들이 얼굴에 빤히 드러나 있다. 얼굴은 자기 자신에게 장악당하고 있다. 얼굴에 침묵이 결여되어 있다면 얼굴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풍경해지고 도시화된다. 인간의 얼굴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넓은 길, 침묵이라는 길이 필요하다. 그것은 내면적인 것을 덮어주고 보호해줄 풍경이다.

    오늘날 라디오가 침묵의 모든 영역을 차지했다. 거기에는 더 이상 침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디오는 순전히 잡음을 생산하는 기계장치이다. 라디오에는 더 이상의 침묵도, 말도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사람들은 오히려 침묵이 갑자기 나타나서 라디오의 잡음을 없애 버릴까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 때문에 모든 공간을 잡음으로 채워놓는다. 라디오의 잡음은 인간을 파괴한다. 라디오 잡음 속에 나타나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인간이 정신으로부터 이탈했기 때문에 생긴 이 자연스러운 라디오의 잡음은 인간을 단순히 본능적으로 충동적으로 만든다. 자유 의지적인 요소와의 연관성을 완전히 상실한다. 사람들은 어느 외딴 지역에 사는 농부도 라디오를 통하여 외부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라디오에 의해서 수용되는 외부세계는 개개인 자신이 구체적인 자연을 연결해 자신의 자연을 키워갈 수 있는 유기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이 점점 작아지고 해체되는 추상적인 세계이다.

    임영호 우송정보대 특임교수

    끝으로 시인인 역자 최승자님의 말이 의미 있게 들린다. 현대는 요란하게 떠들며 경쟁하고 끝까지 살아 남아야 하는 시대로 이다. 이럴 때는 유리한 획일화된 사고를 강요한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에 대한 외침은 인간의 본질과 신에 대한 성찰을 권유하는 의미를 갖게 한다. 이 책은 잠든 우리 영혼을 흔들고 있다. 명상과 사색, 관조의 세계가 실종된 시대에 이 책을 권한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말한 것처럼 이 책은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움을 준다. 다만 조금은 난해하다. 한 줄의 언어만 가지고 몇 번이고 읽어야한다. 천천히 오래 씹어야 즙이 스며 나오는 것처럼.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그냥 과객 아니고... 2018-07-30 10:54:07
    제목부터 오류.
    '라디오의 잡음은 인간을 파괴시킨다 ㅡ>파괴한다.
    말은 많은데, 라디오의 잡음 같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