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짐대회 하면 서울대 갈 수 있나?
다짐대회 하면 서울대 갈 수 있나?
  • 정덕재
  • 승인 2013.08.12 10:1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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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 우리나라가 종교국이라는 것에 대해 자신을 갖는다 / 마당에 서리가 내린 것은 나에게 상상을 그치라는 신호다 / 그 대신 새벽의 꿈은 구체적이고 선명하다 / 꿈은 상상이 아니지만 꿈을 그리는 것은 상상이다 / 술은 상상이 아니지만 술에 취하는 것이 상상인 것처럼 / 오늘부터는 상상이 나를 상상한다 // 이제는 선생이 무섭지 않다 / 모두가 거꾸로다 / 선생과 나는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 종교와 비종교, 시(詩)와 비시(非詩)의 차이가 아니라 아이들과 아이의 차이다 (김수영의 시 ‘우리들의 웃음’ 일부)

철학자 강신주는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저작을 통해 김수영의 시정신을 단독성을 회복하려는 인문정신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단독성은 개인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고 보편성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가능케한다’며 단독자의 의미를 분석했다. 김수영은 위의 시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에 대한 갈등을 지적한다.

우리 사회에서 단독성을 갖고 있는 학생이 사라진 지 오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교육이 실종된 지 오래됐다는 것이다. 다양한 입시제도의 변화와 새로운 교육실험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지만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단독적 존재의 정체성이 번번이 매몰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때로는 긍정적인 취지를 갖고 있는 제도가 사교육 시장이나 학부모들의 그릇된 집단욕망을 통해 왜곡되는 경우를 목격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2. 얼마 전 우리 집 고딩 녀석의 학교 앞을 지나는데 <수능 D-100일 고득점 다짐대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교문 위에 당당하게 걸려있는 걸 보았다. 지난 주는 수능 100일을 앞둔 다양한 이벤트가 곳곳에서 열렸다. 떡이나 엿은 이제 고전적인 상품이 되었고 한 회사에서는 14K 금으로 만든 링을 행운의 숫자 가격인 7만 7천 7백 원에 판매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역사와 신화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전통적으로 백일의 의미는 남다르다.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라는 신화는 고통을 견디는 대표적인 이야기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대규모 행사를 앞둔 100일 전에는 성공을 다짐하는 크고 작은 이벤트를 벌인다. 국가적인 행사부터 연인들의 사랑 나눔까지, 백일의 의미를 짚어보고 축하하고 의지를 다지는 일은 우리 사회에 넓게 퍼져있다.

하지만 <수능 D-100일 고득점 다짐대회> 현수막을 교문 위에 걸어놓는 천박함만은 자제해주길 바란다. 그 것을 보고 콜로세움 완공을 기념해 백일동안 5천 마리 맹수와 검투사가 혈투를 벌였다는 로마시대의 일화가 떠오른 건, 어쩌면 폭력적 수준의 경쟁과 비교육적 가치가 난무하고 있는 학교 현실에서 기인한지 모른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사라졌다는 말을 많이 한다. 대학입학과 관련한 통계 한 두 가지만 봐도 그렇다. 중학교 입시부터 비리를 저지르는 현실 속에서 공정한 경쟁을 찾기 어려운 것 또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능 고득점 다짐대회를 통해 수험생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마음까지 모조리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쉬운 것은 입시가 아닌 취업을 걱정하는 고 3 학생과, 수능 백일 전 등록금 걱정에 눈물이 반인 소주잔을 기울였을 학부모의 심정까지 헤아렸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교육은 그런 마음까지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행사제목이라도 좀 더 학생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경쾌하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다짐대회 한 번 하면 서울대 연고대 가나? 그럼 나는 하버드도 가겠네.” 이제 고딩 1학년인 녀석이 비아냥대는 표정을 지으며 교문을 들어간다. 가뜩이나 방학에 학교 나가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마도 짜증이 두 배로 쌓였을 것이다. 이런 고딩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문 위 현수막은 바람에 펄럭였다. 문득 유치환의 시 <깃발>이 떠올랐다. 그것은 소리없는 아우성도 아니고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도 아니다. 김수영 시인이 <우리들의 웃음>을 통해 ‘모두가 거꾸로다’를 반복해 강조한 것이 1963년의 일인데 2013년 여름에도 그 느낌이 여전히 살아있다. 그래서 나는 수능 백일 전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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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덕재 작가는
배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남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전문사 과정을 마쳤다.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다큐멘터리와 시사프로그램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를 펴냈고 현재 영상콘텐츠를 기획 제작하는 일로 밥벌이를 하면서 여러 장르의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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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 2013-08-12 14:29:11
여러 모로 불편한 구호 '수능. 100일. 다짐. 대회.'

김성곤 2013-08-12 14:28:09
다짐? 좋은 말이라고 마구 가져다 쓰는 군요. 어떤 때 우리가 진정한 다짐을 하는지 한 번쯤 생각한다면 함부로 쓸 말이 아닙니다. 게다가 다짐을 대회에서 한다니..국기에 대한 맹세가 떠오르는 군요. 다짐은 현재 자기에 대한 성찰과 그 결과물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시기와 장소와 상황에서 늘상 하는 것이죠. 100일은 상징입니다. 그 상징은 상상력을 제공하지만 비겁하게 강요해선 안 됩니다. 거기다 수능을 다짐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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