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의 나라’ 조선, 노리개로 보요(步搖)의 美 완성
‘모자의 나라’ 조선, 노리개로 보요(步搖)의 美 완성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 권성하 기자
  • 승인 2018.08.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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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언의 그림 ‘사인시음(士人時吟)’에는 여러 종류의 모자를 쓴 선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굿모닝충청 권성하 기자] 절제와 검약을 미덕으로 삼았던 조선 사회에서 상의원이 궁중 의상실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조선 디자이너’의 상상력이 나래를 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실 의복은 중국의 복식을 참고해 정형화된 경향이 짙었다. 파격적인 디자인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역사 속의 한국인들은 다른 곳에서 패션의 완성을 추구했다.

대표적인 것이 ‘모자’와 ‘노리개’다.

미국인 퍼시벌 로웰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1885년)’에서 “조선은 모자의 나라다. 집안에서 신발은 벗지만 모자는 쓰고 있다. 밥상을 받으면 겉옷을 벗어도 모자는 쓰고 먹는다”라고 썼다.

1888년 프랑스의 민속학자 샤를르 바라는 ‘조선의 모자’라는 특집 기사에서 “조선은 모자의 왕국이다. 공기와 빛이 알맞게 통하고 여러 용도에 따라 제작되는 조선의 모자 패션은 파리사람들이 꼭 알아둬야 한다”고 썼다. 당시 외교관이던 모리스 쿠랑도 “조선은 모자 발명국이다”라고 했다.

조선의 모자는 흑립, 백립, 유건, 탕건, 상투관, 사모, 정자관 등 다양했다.(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남바위는 남녀 공용 방한모다. 여기에 볼을 감싸는 볼끼를 붙이면 '풍차'라는 새로운 이름의 방한모가 된다.

고종의 공식 초상화를 그린 프랑스 화가 드 라네지에르는 “조선에서 모자는 소품을 넘어 자신을 드러내는 상징물이다”라고 했다.

실제로 조선의 지배층이던 사대부는 집안에서 정자관으로 멋을 냈고, 편의상 탕건만 쓰기도 했다. 공직자는 사모를 썼고, 평민은 주로 초립이나 패랭이를 썼다.

모자의 이름도 관(冠), 건(巾), 모(帽), 립(笠) 등으로 다양했다. ‘립’은 일반적인 갓이다. 외출할 때나 손님을 맞을 때 반드시 갓을 썼다. 삿갓은 갈대나 대오리로 거칠게 짠 갓이다. ‘건’은 검은 베나 모시, 무명 같은 천으로 만들었다. 집에서 일상생활을 할 때 썼다.

‘관’은 평소 집에서 정복(正服)을 입고 있을 때 쓰던 것이고, ‘모’는 관복을 입을 때 쓰던 모자다. 가늘게 자른 대나무와 말총으로 짠 뒤 그 위에 사포(紗布)를 씌웠기 때문에 ‘사모(紗帽)’라고도 한다. 일반 백성은 결혼식 때 만 쓸 수 있었고, 새신랑이 사모를 쓰고 허리에 높은 관리들이 하는 굵은 허리띠를 둘렀기 때문에 ‘사모관대(紗帽冠帶)’라고 불렀다.

조선 선비들의 패션 감각은 갓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 24년(1442년) 9월 옥석(玉石)과 번옥(燔玉), 마노 등으로 만든 갓끈은 당상관 이상만 착용할 수 있고, 향리에게는 옥·마노는 물론 산호·수정으로 만든 것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표적인 갓끈의 종류는 헝겊으로 만든 포백영과 옥, 마노, 호박, 산호, 금패, 밀화, 수정 등으로 만들어진 주영, 대나무로 만든 죽영 등이 있다. 갓끈은 갓을 쓰면 턱 밑에서 매듭을 짓는 형태지만 주영이나 죽영은 장식처럼 길게 가슴 밑까지 내려뜨렸다. 대신 검은 헝겊 끈을 따로 달아 턱에 묶었다.

프랑스 화보지 '르 프티 주르날'은 1900년 12월 30일 열린 파리박람회의 한국관 모습을 그림으로 실으면서 전면 중앙에 붉은색 아얌을 쓴 조선 여성의 모습(왼쪽에서 두번째)을 담았다. 맨 오른쪽 그림은 폴 자쿨레가 제작한 다색목판화로 조바위를 쓴 여인이 아이를 안고 포대기를 두른 모습이다.

조선은 추위를 막는 방한모도 종류가 다양했다. 이엄(耳掩), 호엄(狐掩), 피견(披肩), 풍차(風遮), 볼끼, 남바위, 아얌, 조바위, 굴레, 만선두리, 휘항 등이 대표적이다. 남자들은 만선두리, 휘항을 썼고, 여성들은 아얌, 조바위를 애용했다. 남바위, 풍차, 볼끼, 굴레 등은 남녀 공용이며 남바위에 볼을 감싸는 볼끼를 붙이면 풍차가 됐다.

개화기 시절 서양인들은 여성용인 아얌과 조바위에 매료됐다. ‘아얌’은 머리에 쓰는 모자 부분과 뒤로 늘어지는 댕기인 드림 부분으로 이뤄진다. 모자의 하단부에는 검은 털을 덧대고, 상단부에는 비단을 누벼 줄무늬를 만든다. 그 뒤 뒤통수 쪽에 두 가닥의 댕기를 늘어뜨린 형태다.
‘조바위’는 앞이마에서 볼을 지나 뒷목에 이르기까지 유려한 곡선이 특징이다. 이마를 가리고, 볼 부분의 외곽선을 따라 홈질을 했다. 이마와 양 귀를 덮어 여성의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가르마를 따라 꿴 산호 구슬이 이마로 흘러내리면 시선은 자연스레 여인의 이목구비에 집중하게 된다.

조선 사회의 패션을 선도한 소품은 ‘노리개’다. 사뿐사뿐 걸음마다 흔들리는 노리개 특유의 ‘보요(步搖)의 미(美’)는 정적인 한복에 생동감을 더해줬다. 궁중이나 상류사회, 평민을 막론하고 조선 여인들이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는 패션 아이템이었다.

몸에 차는 패물류는 원래 칼이나 숫돌처럼 실제 필요한 물건을 허리춤에 달았던 북방 유목민의 습속이다. 신라 사람들은 허리띠에 온갖 장식적인 요패를 달았고, ‘고려도경’에는 귀족 부녀자들이 금방울과 금향낭을 허리띠에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채로운 색상과 귀한 패물 등으로 장식된 노리개를 저고리의 고름이나 치마허리에 달면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장식으로 부착된 매듭과 술은 몸의 동작에 따라 율동감을 더했다.

노리개는 패물의 숫자에 따라 삼작과 단작으로 구분된다. ‘삼작 노리개’는 3개의 노리개를 한벌로 꾸민 것으로 소삼작, 중삼작, 대삼작으로 나눈다. ‘단작 노리개’는 삼작노리개 중 하나를 달거나 처음부터 하나로 만들어진 노리개다.

노리개는 조선 여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패션 아이템이다. 사진은 대삼작노리개(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은파란가지삼작노리개(단국대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소장), 은칠보오작노리개(태평양박물관 소장), 노리개(국립민속박물관 소장·번호 순서)다.

노리개에 단 패물은 재료에 따라 금·은·옥·산호 노리개, 형태에 따라 박쥐·나비·매미·투호·방아다리 노리개 등으로 불렸다. 이외에 향갑, 향낭, 침낭(바늘집), 장도(粧刀) 등 실용적인 것을 달기도 했다. 특히 향을 넣은 향갑이 인기 있었고, 장도는 호신용인 동시에 의장용으로 조선 여성에게 정절의 상징이기도 했다.

‘패션디자인(fashion design)’은 옷과 장신구에 관한 미학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독특한 ‘의생활(衣生活)’은 존재했다. 엄격한 신분 질서 속에서 조선의 패션디자이너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했지만 창의성과 색채 감각, 조형미, 미적 감각, 유행 감각 등은 오늘날에 견줘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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