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북벌과 조선의 개혁을 부르짖다
[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북벌과 조선의 개혁을 부르짖다
(17) 대전의 인물-이유태(李惟泰)
  • 자료협조=대전평생교육진흥원
  • 승인 2018.08.10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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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태(李惟泰) 글씨-〈이유태 편지〉, 『근묵』, 1662, 행초서, 18.7×34㎝,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옥천 군수(沃川郡守)에게 환자를 부탁하며 보낸 편지.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생몰연대 : 1607년(선조40)∼1684년(숙종10)
·거 주 :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룡동

아, 전하의 나라는 위태롭습니다. 천하의 대로(大老, 김상헌)가 남의 공격을 받아 비난과 모욕이 이에 이르렀는데도 조정 대신들은 예삿일로 보니 그 나머지는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신은 뜻 있고 기미를 아는 선비들이 산림(山林) 깊숙이 숨어서 나오려고 하지 않고, 온 자들도 필시 실망하여 가버리려고 할까 염려됩니다. ...지금 여러 파벌이 서로 다투고 세상이 어두운 때인데도 모두 돌아갈 것만 생각하고 나라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종묘 사직과 백성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이유태가 효종에게 올린 글-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모인 삼현대
삼현대는 세 명의 현명한 학자들이 모인 곳이라는 뜻으로, 기호학파의 대표격이자 조선 후기 예학을 이끈 3인방 송준길, 송시열, 이유태가 어울렸던 곳이다. 송준길, 송시열과 함께 활동한 초려 이유태는 경주이씨로 공주에서 태어나서 금산에서 활동했다. 그의 집안은 원래 서울에서 살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으로 내려와 지냈다.

이유태는 유년기부터 진잠의 학자 민재문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에는 송준길, 송시열 등과 함께 연산으로 가서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의 문하에서 차례로 공부하였다. 이때 이유태는 송준길, 송시열과 평생의 동지로 맹세한 사이였고, 김집이 이 세 사람을 매우 절친한 관계로 평가할 만큼 돈독하였다. 따라서 이유태는 이곳 대전 지방과 깊은 인연을 갖게 되었다.

이유태는 연산에서 공부한 후 은진에서 거주하였고, 그 후 45세부터 57세까지 10년간은 대전에서 살았다. 그가 이곳에 와서 집을 짓고 살았던 곳은 ‘새우’라고 칭해지는 곳인데 그의 생애를 다룬 기록에는 ‘초외(현재 대전 국립중앙과학관 부근)’라고 되어 있다. 이유태의 문집에는 그가 이곳에 와서 집을 짓고 살게 된 이유가 나타나 있다. 스승인 김장생의 장례식에서 송준길, 송시열, 이유태 세 사람이 가까운 곳에 살며 서로 의지하며 살기를 약속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림들은 그와 송준길, 송시열 세 사람이 머물던 그 곳을 ‘삼현대(三賢臺)’라고 불렀다. ‘삼현대’는 ‘삼현(송준길, 송시열, 이유태)’이라고 불렸던 세 사람이 함께 지냈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공주 이유태 유허지

생애
이유태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이다. 인조·숙종조의 이름난 유학자로 특히시무에 밝았던 정치사상가였다. 그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태지(泰之), 초려(草廬),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이유태의 선대는 서울에서 대대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직후 그의 아버지가 지금의 충청도 금산으로 이사하였다. 어린 시절을 금산에서 보내고, 청년기에는 공부를 위해서 진잠과 연산에서 지냈다. 장년기는 금산과 진산, 그리고 공주에 이사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 그가 10세 되던 해에 부친을 여의었고, 15세 때에 진잠의 처사 민재문에게 3년간 가르침을 받고 이어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과 함께한 이유태는 “살아서는 뜻을 함께 하고 죽어서는 후세에 전해짐을 함께 한다(生同志 死同傳)”고 맹세할 정도로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24세에 별과에 합격하였으나 이때 병환이 깊어지는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서 전시를 포기하였다. 이듬해 스승 김장생이 작고하자 그는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을 스승으로 모시고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634년(인조12) 김집의 천거로 희릉참봉이 된 이후 병자호란 직후까지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대군사부(3차)·내시교관·시강원자의 등의 벼슬을 연이어 받았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오랑캐인 청에 굴복하게 되자 ‘선비가 가히 출사할 의리가 없다(士無可仕之義)’고 하고 일체의 벼슬을 거절하고 무주덕유산 산미촌에 들어가서 학문과 후진의 교육에만 몰두하였다.

조선 후기의 숨어있는 실세, 산림세력
산림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인조 시기부터이다. 인조는 산림을 높여서 등용한다는 명분 아래 지방에서 은거하는 선비들을 불러다가 등용하였다. 이들은 주로 학자들을 길러내던 성균관이나 세자의 교육을 맡은 시강원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산림의 정치적 성향은 서인 중에서도 노론이 많았으며, 지역적으로는 호서지역이 가장 많았다.
산림들은 주로 지방에서 선비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면서 지방 선비들의 의견을 중앙에 전달하기도 하고, 중앙의 정치가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면 비판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등 정계와 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649년(효종1),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의지를 보이자 이유태는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북벌계획에 참여했다. 그의 나이 43세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림의 대거진출은 당시의 집권세력간의 갈등을 초래하였다. 그가 올린 상소로 인하여 일정기간 동안 과거 응시자격이 정지되는 벌에 처해졌다가 7년만에야 풀려나게 되었다. 이유태는 과거 응시자격이 정지된 기간 중에 향촌에 머물러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가 유성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기간이었다.

1656년(효종7) 그는 다시 공조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모친의 병환과 자신의 부덕을 내세워 출사하지 않았다. 1658년(효종9)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천거로 지평이 되고, 이듬해 시강원 진선·집의를 거쳐 현종 즉위 후 공조참의·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1) 효종의 죽음을 계기로 발생한 기해예송(1659, 예송(禮訟):예의 해석을 둘러싸고 벌이는 논쟁) 복제시비 때 호군으로 있으면서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옹호하였다.

뒤이어 효종 말년 이래 적어두었던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를 논하고 구민(救民)·구국의 대책을 제시, 왕이 비변사로 하여금 검토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채택되지 않자 실망해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그 뒤에도 그에게 이조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이조참판 등이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숙종이 왕으로 즉위하고 남인의 탄핵을 받아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가 5년 뒤에 풀려났는데 이때 그의 나이 73세였다.

예학에 조예가 깊었던 이유태는 스승 김집과 함께『상례비요(喪禮備要)』·『의례문해(疑禮問解)』등을 교감하였다. 처음에는 송시열과 의견을 같이 하였던 이유태는 유배기간 중 그와 예 논쟁에 연관된 보이지 않는 알력이 발생하였다. 이후 이유태는 송시열을 비롯하여 서인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공주 중호로 돌아온 이유태는 이곳에서 독서로 여생을 보내다가 1684년(숙종10)에 78세로 생애를 마쳤다. 소론에 의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금산서원(錦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초려집(草廬集)』 26권이 있다. 1986년 유림들과 후손들이 이유태가 만년을 보내고 후손들이 세거해 온 공주에 이유태를 배향하는 서원이 없는 사실을 안타깝게여겨 용문서원[공주시 상왕동(중동골)]을 세웠다. 1988년 용문서원에 유물관을 신축하여 이유태의 유물과 관련 문서들을 전시하고 있다.

초려문집-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유태의 시문집. 1865년 후손 경등이 간행하였다. 25권 14책. 규장각도서.

사상
예학(禮學)에 뛰어나 「예변」·「의례문목」·「의례문답」·「사례홀기」 등 방대한 분량의 예학서를 저술했으며, 김집과 함께 『상례비요』·『의례문해』등을 교감(校勘)✽했다. 그리고 경학서로는 『사서문답』과 『역설』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율곡 이이의「만언봉사」를 토대로 하여 2만 여자의「기해봉사」를 짓기도 하였다.

그의 이기설(理氣說)을 보면, 그는 만물이 생기기 이전에 태극과 음양, 이기는 묘합하여 있기에 이(理)를 말하면 거기에 문득 기(氣)가 있다고 하였다. 심성론에 서는, 성(性)과 정(情)이 체용의 관계에 있는데, 여기서 성은 이만 말한다면 정은이기를 합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물의 동질성을 이(理)에서 찾고 차이점을 심(心)에서 찾았다. 수양론에서는 격물과 거경을 중시하여 이것으로 성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했다. ✽교감(校勘) : 같은 종류의 여러 책을 비교하여 차이 나는 것들을 바로잡음.

경세론은 「기해봉사」에 잘 나타나 있다. 우선 당시 최대 폐단은 농민의 흩어짐과 토지의 황폐에 있다고 보고 향약에 의한 향촌조직과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의 실시, 양전(量田) 시행과 사창(社倉) 설치를 주장하고, 양인(良人) 이상 자제의취학과 15세 이후 능력에 따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선택을 역설하였다. 구체적인 변통책으로서는 어염세(魚鹽稅)의 국고 전환과 면세전의 폐지, 내수사의 혁파,부세(賦稅) 및 인역제(人役制)의 개혁, 공안(貢案)의 조정과 감축, 양전제의 개선, 관제의 개편과 합리적 운영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유태는 율곡 이이의 사상을 계승하였으며, 실(實)에 힘쓴 학자이다. 당시 사회는 당색과 학설에 집착하여 민생은 날로 피폐해져 갔다. 이런 시기에 초려 이유태는 국정의 폐단을 지적하고 백성의 삶을 유익하게 하는 정책을 제시함으로써 왕도정치의 기반을 닦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가 참다운 유학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개혁을 부르짖다
초려 이유태는 우암 송시열의 천거로 잠시 조정에 나갔지만, 국가의 장래를 위하는 길이 아님을 깨닫고 곧 산림으로 돌아온다. 이는 평소 “현 상황 하에서 점차군신이 편안해지고 백성들은 이를 편안하고 즐겁게 여기게 되면, 중흥업적의 대망은 영원히 기회를 잃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 북벌을 위한 개혁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지만, 조정의 개혁의지는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물러 나와 자신의 북벌을 위한 야심 찬 계획을 올곧은 선비정신을 발휘하여 장문의 글로 정리한다. 그것이 바로 칼날 같이 바른 말을 쏟아 낸 「을해봉사(乙亥封事)」라는 상소문이다. 이 글은 17세기 조선 사회에 크나큰 파장을 일으키며 많은 학자들에게 북벌의 정당성을 호소하는데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 개혁정신이 생생히 살아남아 국가가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평소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초려 이유태는 시대적 폐단을 직접 현실에서 하나하나 찾아내어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나가려고 노력한 학자다. 그는 탁상공론에 그치지 않고 그 당시의 시대적 폐단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개혁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 그의 시대를꿰뚫어 보는 혜안은 고스란히 「을해봉사(乙亥封事)」에 기록되어 있다. 초려 이유태는 당면한 현실 문제를 모르는 척 하는 세상의 인심을 개탄한다. 그는 사치풍습을 모든 폐단의 근본이라고 말하면서 근면하지 않고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려고 하는 것에 대해 크게 경계해야 된다고 경고한다. “대개 천하의 이치는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한다. 인심은 구차하게 편안함과 고식만을 추구하여 그럭저럭 세월만 헛되이 보냄이 달로 다르고 해마다 같지 않아 쇠약하고 퇴폐함이 지금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시대를 고민하며 현실을 개혁하려고 했던 초려 이유태를 떠올릴 수 있다.

초려 이유태는 오로지 인재 등용만이 국가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날의 성균관 학생들은 앞으로 조정의 관리가 될 것인데 실질적인 학문을 연마하지 않았으니 어찌 치인(治人)의 방책을 알겠는가”라고 하면서 경전을 중시하는 교육을 강조한다. 한편,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경전 공부뿐 아니라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 익히기에도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즉 초려 이유태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야말로 진정으로 국가에 꼭 필요한 사람이고, 나아가서는 결국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이런 인재 등용에 대한 생각은 오직 나라의 미래를 생각한 충성심의 발로였다. 그래서 그는 인재 등용의 합리적인 방식으로 두 가지 방안을 내놓는다. 하나는 향교와 서원의 교육과정에서 『주례(周禮)』에 의거하여 예를 따르는인재를 조정에 추천하는 방식이고요. 또 하나는 문무를 겸비하여 타의 모범이 되는 인재를 조정에 추천하는 방식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역시 초려 이유태는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당대의 교육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종에게 이유태를 천거한 송시열
효종이 송시열을 독대(獨對)하여 “북벌을 같이 도모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라는 질문과 “평소 본인이 말한 주자의 양민양병필상방론(養民養兵必相妨論)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있느냐”라는 물음에 송시열은 주저 없이 초려 이유태를 천거한다. 이에 효종이 “이유태는 어떠한 사람인가”라고 구체적으로 묻자 송시열은 “이유태는 항상 말하기를 ‘만약 주상께서 대계에 대한 뜻이 확고하다면, 모름지기 모든 국정을 굳고 확실하게 해야한다. 비록 사람이 죽더라도 우선 집 뒤에 매장하며, 이를 미루어 민력과 재물을 낭비하는 모든 일을 막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서 오직 양민(養民)·족식(足食)하는 것을 급선무로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송시열이 초려 이유태를 적극 추천하니 효종이 “그의 말이 그렇다면 참으로 쓸 만한 사람이다.”라고 인정하였다 한다. 

자료협조=대전평생교육진흥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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