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충청 김형규 자전거여행가] 힘들게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제주4.3평화공원은 봉개동 2만1900여㎡의 부지 위에 4.3평화기념관, 위령제단, 상징조형물 등의 시설을 갖췄다.
1980년대 민간사회단체는 4.3사건의 진상규명과 함께 위령사업을 정부에 요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12월 후보시절 4.3특별법제정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이후 특별법 공포와 부지 매입 등의 절차를 거쳐 2008년 3월말 개관하기에 이르렀다.
기본계획부터 현상공모, 전시기획 등에 이르기까지 전문가 그룹이 다수 참여한 흔적이 엿보인다. 아쉬운 건 4.3평화공원이 문을 연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유명 맛집이나 민간 전시‧박물관에 비해 지명도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즐거움을 위해 찾은 제주여행이 4.3학살의 어두운 그림자로 반감되지 않을까라는 심리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요즘은 가벼운 마음으로 비극의 역사를 반추하는 ‘다크 투어리즘’이 눈길을 끌고 있다. 40-50년 전 현충일 주간을 맞으면 며칠간 검은 리본을 반드시 패용하고 옷가짐을 단정히 하거나 현충일 당일은 술집이 문을 닫고 순국선열을 참배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각종 백일장대회가 열리고 반공사상을 재검검하는 삼엄한 일주일을 보냈다. 전후 세대는 늘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 “너희들은 몰라”라는 지청구를 들어야했다.
중국의 3세대 작가 위화는 소설 ‘허삼관매혈기’에서 비극적인 문화혁명을 재치로 풍자해 인정을 받았다. 문화혁명을 겪지 않은 작가였음에도 코믹하게 뒤집어버린 것이다. 우리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곳간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유쾌한 ‘팝콘 비’로 반전시킨 것처럼.
4.3평화공원에 전시된 여러 조형물은 숙연함과 함께 예술성, 토속미가 함축돼 있다. 눈밭에서 맨발의 엄마가 아기를 끌어안고 죽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비설(飛雪)’은 4.3사건의 특징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1949년 겨울 봉개동 지역에 2연대의 토벌작전이 전개되자 변병생(당시 25세)씨가 두 살 난 젖먹이 딸을 업고 피신중 총에 맞아 희생됐다. 후일 행인에 의해 눈속에서 모녀의 시신이 발견됐다. 눈을 표현한 흰 대리석 원형판 위에 세워진 청동상은 아이를 최대한 노출시키지 않으려 잔뜩 웅크리고 있는 엄마의 보호본능 그 자체다.
청동상의 외곽은 제주석으로 나선형 돌담을 둘러쌓아 모녀를 감싸고 있다. 돌담에는 제주 전래 자장가인 ‘웡이자랑’ 가사가 음각돼 있다.
행방불명인 표석은 제주4.3사건 희생자 중 시신을 찾지 못해 묘가 없는 행불인을 기리기 위해 개인표석을 전시해 추모하는 공간이다. 행불인들은 4.3사건 중에 체포돼 대전 등 내륙의 각 지역 형무소에 수감된 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다. 제주지역 2012기, 대전지역 270기, 경인지역 554기 등 총 3895기가 들어서 있다. <계속>
제주4.3사건은
해방 이후 미군정의 실정과 민심이 불안한 상황에서 1947년 제주읍 관덕정 3.1절 기념대회서 경찰의 총격으로 주민 6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지역 민관이 총파업으로 이에 항의하자 경찰과 서청단원을 파견해 탄압했다.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봉기해 4.3사건이 본격화되고 5.10총선거가 무효처리됐다.
그해 8월15일 정부수립 이후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병력을 증파해 진압작전을 펼쳤다. 11월17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산간마을을 초토화하는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됐다.
민간인 학살은 이때 상당수 자행됐다. 사태가 진정될 즈음 한국전쟁이 터져 예비검속자와 대전 등 내륙의 형무소에 수감됐던 제주출신 재소자가 희생됐다.
1954년 한라산 금족구역이 해제되면서 7년7개월에 걸친 비극은 막을 내렸다.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2만5000-3만명의 주민이 희생됐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