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섭의 그림읽기] 제3자를 내세워 엿본 ‘은밀한’ 화실

권영우 作 ‘화실별견’

2018-12-09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예진흥부장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예진흥부장] 서양 미술에서 여성 나체는 무한한 미의 원천이자 ‘미의 신’이다. 우주의 미가 집약된 것으로 보고, 절대미의 구현 대상으로 여겼다.

변상섭

누드의 역사가 깊은 것도, 누드 작품을 남기지 않은 화가가 없는 것도 이런 이유일게다. 외설적, 또는 망측스런 존재로 여기는 우리나라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금기사항인 만큼 관음(觀淫) 또는 절시(竊視)의 대상이었다.

권영우(1926-2013)의 화실별견(1956·畵室瞥見)은 우리의 이런 문화적 정서를 함축하고 있는 그림이다. 제목을 보면 더 확실해진다. ‘화실에서 언뜻 보다’라는 의미다. 무엇을 언뜻 보았단 말인가. 그림 속에 정답이 있다. 작품은 화가가 팔레트를 들고 이젤 앞에서 전라의 모델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화실 풍경이다.

화구가 어지럽게 널려 있어 자연스러워 보이는 분위기지만 전라의 여체에서 풍기는 긴장감도 팽팽하다. 은밀한 화실을 언뜻 본 시선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해답은 시대적 배경에 있다.  화가라면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장르지만 당시에는 그것을 용인하는 환경이 아니었다.

모델 구하기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할 수도 없는 께름칙한 미술이 누드다. 그래서 작가는 온전한 누드 작품이 아닌 제3자를 내세워 엿본 장면이란 기발한 타협책을 찾아낸 게 아닐까. 화실을 엿본 가상의 인물도 내세웠다. 작가는 1인 2역을 한 셈이다.

뒷모습의 나체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정면상보다는 부담이 덜하다. 그것은 감상자도 마찬가지다. 당국의 검열(?)에서 자유스럽고 반면 여체에 대한 신비감을 고조시키는 효과도 있으니 일거양득이다.

근·현대 미술에서 등을 돌린 누드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화실별견은 누드를 백안시하는 시대상과 작가의 궁여지책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여러 정황과 작가의 기지와 재치를 생각하면서 그림을 보노라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한다. 면을 분할한 구성이 재미있다.

밝고 어두운 여체는 돋보이게, 그러나 그것을 보는 작가는 검은색의 실루엣으로 처리했다. 관음, 또는 은밀함을 의도한 복선일 것이다.  함남 이원 출신인 권영우는 '해방 1세대 작가'로 동·서양화의 경계를 뛰어넘은 폭넓은 작품활동을 펼친 근대 화단의 대표 작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