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원순 시장 비극 둘러싼 '젠더' 논란...'거시적 정의'와 '미시적 정의'

2020-07-11     정문영 기자

《최광희 칼럼》 '거시적 정의'와 '미시적 정의'                      

어제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페이스북에 쓴 글을 두고, 많은 이들이 비판을 하더군요. 정의당이 '페미당'이 되어가고 있다고 탄식하는 분들도 봤습니다.

나는 그 '현상'을 보며 대한민국이 지금 상당히 혼란스러운 정신적 아노미 상태를 통과하고 있다는 걸 새삼 확인했습니다. 지난 총선에서 확인했다시피, 현상적으로 이 나라는 87년 체제를 이끌어온 이들이 개발 독재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이들에게 압승을 거뒀습니다. 그런데 그 압승 이면에 여러 가치의 혼돈이 자리잡고 있음을 우리는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의'의 정의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거시적 정의'를 바로세우려고 총력을 기울이다 보니 '미시적 정의'를 빼놓았고, 사실 몇 해 전부터 이것이 계속 우리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는데도요. 세상이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한 것 같지만 거의 아무것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습니다. 불평등과 차별, 혐오 범죄와 젠더 폭력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 궤도로 돌아왔다 해도 더욱 심화되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정치공학, 그러니까 나의 삶과 별로 상관도 없는 '정치공학적 정의(실은 권력 지형의 역학)'에 감놔라 배놔라 훈수질을 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쓰는 언론은 기레기이고, 내 마음에 드는 정치인을 수사하는 검찰은 '떡검'입니다. 비판에도 진영논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故 박원순 시장의 비극을 둘러싼 이번 논란에는 '젠더적 편향성'이 작용합니다. 정의와 진보를 말하는 이들이 성추행 의혹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일축합니다. 일축을 넘어 마녀사냥을 합니다.

이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뭐가 정의이고 진보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이의 아픔이 왜 생겼는지 들여다보고 그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자는 게 정의입니까, 아니면 진보적 정치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 집중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덮어두자는 게 정의입니까.

페미니즘은 진보의 연장선에 있는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수용해야 하는 게 지당하지 않습니까? 정치적 성향은 진보이되, 내가 남자이므로 페미니즘을 폄훼하면 그게 과연 진보입니까? 여러분은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을 때 미국이 우리의 동맹이므로 그 전쟁을 지지했습니까? 아니시겠죠. 강대국이 트집을 잡아 약소국을 침공하는 게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니 분개하고 반대하셨겠죠. 그런데 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모순된 태도를 가지십니까? 그가 우리 편이어서요?

진보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태도이지, 원래 가졌던 신념을 박제로 만들어놓고 붙들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보수인 거죠. 정확하게 말해 '수구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소위 진보는 새로운 가치로 거듭나는 일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집권하자마자 '수구'가 되었습니다. 슬프지만, 새로운 가치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필자: 영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