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 인사이트] 에미상 ‘오징어 게임’ 정치 때문에 가능했는데, 지금은?

2022-09-15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사진=페이스북

[굿모닝충청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전 세계인들이 ‘오징어 게임’의 에미상 6개 부문 수상에 찬사를 보냈고, 다시 한 번 열광했다. 단, 일본의 반응은 미묘했다. 공식적으로는 아시아의 성과라고 언급하는 언론도 있었지만, 씁쓸한 반응이었다.

씁쓸한 반응은 단지 한국에 대한 역사적인 감정을 넘어서는 심리적 응어리 때문이다. 생존 게임 혹은 데쓰 게임의 원조는 자기들인데, 한국이 이를 가져가 ‘오징어 게임’을 만들고 에미상까지 휩쓸었으니 배가 아플 만하다.

아예 그들은 자신들의 만화를 훔쳐다가 만든 것이 ‘오징어 게임’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물론 얼토당토않다. 단순히 설정이나 얼개가 콘텐츠의 전부도 아니다. 일본의 생존 게임 혹은 데쓰 게임은 전 세계적인 팬덤을 갖지 못했다.

일본이 자신의 창작물이라고 하는 사례들도 결국 서구에서 가져온 것이다. 생존 게임, 데쓰(death) 게임도 모두 서구 혹은 영미권에서 들여왔다.

만약 일본에서 ‘오징어 게임’을 만들라고 했다면 만들 수 있었을까. 결코, 만들 수 없고, 단지 형식만 흉내만 냈을 것이다. 왜 그럴까?

일본의 생존 게임이나 데쓰 게임은 정치 사회적인 맥락들을 탈색시켜 버린다. 특정 공간, 예를 들면 학교라든지 도박 공간 자체에 한정시켜 콘텐츠를 구성한다. 이는 영미권의 영향으로 현실이 아닌 공간과 개인 동기를 초점이 맞춰 버리는 패턴을 보여준다. 여기에 일본 콘텐츠는 잔혹성을 더욱 가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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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징어 게임’은 오히려 깔끔하다. 무엇보다 정치 사회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의 본질을 건드려주고 있다. 이러한 면은 확실하게 진일보했다. 그것은 단지 한국의 사회적인 모순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모순이기 때문에 글로벌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오징어 게임’을 못 만들까? 만들 수 있는 역량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역량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치가 그 역량을 파괴했다.

자민당 일당 독재가 오래 이어지는 정체된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위축되었고, 진일보한 콘텐츠 역시 나오기 어렵다. 매우 사소한 개인의 취향에 침잠하여 세계인들의 보편성 기호에서 멀어졌다. 이런 점을 넷플릭스는 정확하게 간파하고 한국에 대폭적인 투자 지원을 했다.

중국, 홍콩, 대만 등등 아시아를 둘러볼 때, 오징어 게임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정치 사회적인 환경과 분위기가 자유로운 표현과 창작을 허용하고 부담을 지우지 않을 때,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에미상도 가능한 것이다. 단지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호응을 보낸 결과다.

다만 상을 주는 이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번 에미상이 케이블 HBO의 ‘썩세션’에 작품성과 각본상을 주고, ‘오징어 게임’에 고작 작품상과 남우 주연 배우상만 주면서 조연상의 오영수 등을 희생시켰다. 어쨌든 전혀 근거 없는 수상은 없다.

그런데 한국의 이런 콘텐츠 인기와 활약이 계속될까? 최근의 상황은 불안하다. 정치 사회적 환경이 불안정하고 투명성이 떨어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대통령을 비판하는 풍자화가 수사를 받았고, 곧 블랙리스트가 작성됐다. 이번 윤석열 정부에서도 대통령을 비판하는 풍자화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고 있다. 이에 대한 처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는 아닐지라도 자유로운 예술 문화적 표현이 있을 때 진정한 민주국가이자 선진국이라는 점은 대한민국 유치원생도 아는 일이다.

김헌식

또한, 청와대에 사적인 라인들의 작품 전시회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시대적 트렌드는 공모를 통한 투명한 기획과 집행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작가도 그렇지만 지금 활약 하고 있는 K 콘텐츠의 공헌자들은 민주 정부에서 활발하게 발굴되었다. 이는 자유로운 소통과 표현의 자유가 예술적으로 보장될 때 가능하다.

정치와 문화예술은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미래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성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일본과 중국을 보며 비웃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들의 문화적 디스토피아가 우리에게 도래하지 않도록 사소한 것 하나 하나 예방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