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춘사 나운규 선생…10월의 독립운동가

2016-09-30     채원상 기자

[굿모닝충청 채원상 기자] 독립기념관이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영화 ‘아리랑’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영화감독 춘사 나운규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선생은 1902년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다.

3․1운동 이후 간도지역에서 무장 독립운동이 활발해지자 선생은 도판부(圖判部)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도판부는 독립군이 간도에서 회령으로 진격하기 전 터널이나 전신주를 파괴하는 임무를 띤 결사대였다.

도판부를 나와 서울에 온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예비과정에 입학했다.

그러나 일제가 철도 파괴 계획에 대한 비밀문서를 입수하고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선생은 1921년 3월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3년 3월 출소한 나운규는 예림회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하면서 영화인의 길을 걷게 됐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두 번째 작품인 '총희의 연'에서 가마꾼으로 데뷔하고, 「심청전」ㆍ「장한몽」ㆍ「농중조」 등의 영화에 연거푸 출연하면서 특색 있는 배우로 주목받았다.

1926년 10월 1일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영화 ‘아리랑’을 제작․상영한 후 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았다.

이어 ‘풍운아’, ‘잘있거라’, ‘사랑을 찾아서’ 등을 제작했다.

특히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시기의 경험을 토대로 제작하였던 ‘두만강을 건너서’는 일제의 엄격한 검열로 제목을 ‘사랑을 찾아서’로 바꿔야 했다.

1931년 ‘말 못할 사정’ 이후 제작한 영화마다 흥행에 실패하자 폐병이 재발했다.

병중에서도 ‘오몽녀’를 제작하는 등 열의를 보였으나 폐병이 더욱 악화되어 1937년 8월 9일 향년 36세로 사망했다.

영결식은 ‘아리랑’이 개봉되었던 단성사에서 열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활동을 기리어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독립기념관은 나운규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별도의 전시코너를 마련하고 관련 자료를 10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