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섭의 그림읽기] 스님 손에 잡힌 이, 어찌됐을까?

조영석 作 ‘이 잡는 노승’

2018-09-01     변상섭 충남문화재단 문예진흥부장

노승이 나무 등걸에 앉아 심각하게 골똘하는 모습이다. 손가락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두 눈에 잔뜩 힘을 준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요즘 신세대들은 땅띔도 못할 장면이다. 흐르는 세월에 이미 자취를 감춰버린 정경이니 그럴 만하다. 머릿니 때문에 밀가루 같은 하얀 디디티를 머리에 뒤집어썼던 기억이 있다면 아마 어렴풋이 짐작을 할 것이다.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의 ‘이 잡는 노승(18세기)’이다. 스님은 하안거 수행을 마치고 만행 길에 오른 모양이다. 나뭇가지의 녹음이 짙은 것으로 보아 때는 한 여름 쯤으로 보인다. 날이 더우면 땀이 나고 피부가 거친 옷에 쓸리면서 몸이 굼실거리기 마련이다. 여기에 이까지 가세한다면 참을성 많은 스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참다 못 한 나머지 스님은 나무 그늘 아래 다리쉼을 핑계 삼아 이 잡기 한판을 벌인다. 헌데 승려인지라 살생을 할 수 없으니 이를 손가락사이에 끼고 어찌할 줄을 모른다. 스님의 표정과 눈초리를 보면 망설임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눈동자가 이를 향해 한쪽으로 쏠려있고 때문에 얼굴이 익살스럽게 일그러져 있다. 이를 잡아야 하겠고, 죽일 수는 없으니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입까지 씰룩거린다. 어찌 보면 이 잡기는 스님의 인내심을 실험하는 또 다른 수행법인 것이다.

스님의 행색도 이 잡기에 버금간다. 듬성듬성 난 짧은 머리, 제멋대로 자란 수염에 등 호감스런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묘하게 친근감이 느껴진다. 스님이라서 아니면 이 잡는 모습의 천진성 때문인지 그건 감상자의 몫으로 접어두자.

문제는 이의 운명은 어찌됐을까. 스님은 나무 밑 어딘가에 놓아 주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굶어 죽을까 싶어서 내심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방생이 본의 아니게 살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 속 천진스런 노승을 보면서 요즘 시끄러운 조계종 종단이 오버랩이 되어 소개해 봤다. 관아재는 화원은 아니지만 실력이 출중했다.

인물화를 잘 그려 의령현감으로 있을 때 영조의 세조 어진 모사 어명을 환쟁이 취급을 우려해 거부하는 바람에 파면까지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14점의 그림을 그려 표지에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라고 직접 쓴 사제첩을 남겼다고 한다. ‘이 잡는 노승’도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 사제(麝臍)는 사향노루가 사냥꾼에게 잡히면 자신의 배꼽에서 나는 향기 때문이라고 여겨 배꼽을 물어뜯는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심장한 마음을 담아 그렸기에 오늘까지 전하는 게 아닐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